채워 간다는 건

12월이면 마무리되는 수업들이 많다. 거의 모든 수업이 그렇다.

중순쯤 정리가 되면 몇몇 기관에서는 이미 강사 모집이 한창이다.

오늘은 한 기관에 강사 모집 마지막 날이라 필요한 서류를 챙겨서 준비를 한다.

자격증과 이력서를 정리하는데 문득 10년 전 그날이 떠오른다.

지금 하는 일의 관련 자격증을 (천연비누·화장품 제조사 1급) 처음 취득하고 막연히 이 자격증을 언제,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까? 를 생각하던 즈음이었다.

동네 동생이 기관에 볼일이 있다며 함께 가자고 하였다. 동생은 볼일을 보고 나는 그곳에 근무하시는 분께 여쭤보았다. 혹 천연비누, 화장품 강사 구하지 않냐고. 그분은 나에게 경력이 있냐고 물으신다. 이제 막 따끈한 자격증을 취득한 나에게 경력이란 하얗기만 했다. 그분은 냉정히 말씀하셨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이력서를 가지고 오신다. 본인 같으면 경력이 있는 사람을 뽑겠느냐 없는 사람을 뽑겠느냐. 멋쩍어진 나는 씨익 웃으며 그래도 이력서는 써 온다며 너스레웃음을 보이며 돌아왔다. 그때 나의 감정은 하얗고 막막했다. 그분의 말씀이 틀리지 않았거든. 나는 몇 년의 시간이 지나도 그곳에 이력서를 가지고 갈 수가 없었다.

그해 나는 한 문화센터에서 강사 생활을 시작하였고, 외부 수업이 들어오면 거리가 멀어도, 수강생이 적어도 이력서 한 줄을 채우기 위해 달렸다.

봄이면 꽃구경을 한다 생각했고, 가을이면 일도 하고 단풍 구경도 하고 얼마나 즐거운 일이냐며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

그렇게 한 해 한 해 보내던 중 예전의 그 기관에서 연락이 왔다. 수업이 가능하시겠냐며.

다른 기관과는 달리 만감이 교차했다. 나는 이력서에 그동안 쌓아온 경력을 적어 제출하였고 그곳에서 한 해 두 해 수업을 하였다.

한 줄 한 줄 채워나간 나의 이력서

프린트기에서 출력한 이력서를 보면서… 몇 해 전부터는 경력란에 줄여 적어가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3장까지 갈 필요 없이 큼직한 수업과 꼭 필요한 관련 자격증들만 적어 나간다. 그러면서 손가락으로 세어 보았다. 2012년을 시작으로 며칠만 지나면 이제 만 10년이 되는구나.

두 아이를 키우면서 그렇게 힘든 시간은 아니었다. 남편도 집안일과 힘든 일을 잘 도와주거니와 무엇보다도 자유로운 직업이라 나에게 잘 맞는 일이다.

이력서 한 장으로 많은 생각이 지나간다.

수강생분의 질문에 말문이 막혀 버릴 때의 당혹스러움. 그것은 아마 나의 부족함이 그에게 들켜 버릴까 그랬겠지?

10년 전과 10년 후의 나를 생각해보면 지금은 여유가 있다. 수십 수백 번을 만들어 보면서 오는 경험들. 그것에서 얻어지는 실패와 요령. 그때보다는 비교가 안될 만큼 많은 것을 알아 왔지만 모르는 것은 모르겠다고 말하는 솔직함. 좀 능글능글해졌다고 해야 하나?

그때도 지금도 늘 생각하는 것은 겸손이다. 아는 만큼 알려드리되 거만한 강사는 되지 말자. 그렇게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는 강사가 되고 싶고, 사람이 되고 싶다.

나의 이력서에는 어쩌면… 여유와 편안함이 채워졌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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