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니와 도라지꽃

시엄니께서 전화하셔서는
며늘아가~
밭에 오이랑 가지랑 고추가 조롱조롱하다~
언넝와서 따가거라~하신다
예~엄니~이따 갈게요~하고 오후에 가니
벌써 다 따놓으시고 포장까지 해놓으셨다
차에 타려는데 엄니밭에 도라지 꽃이 화사하게 피었길래
엄니~저 도라지꽃 몇 개만 따가면 안 돼요? 하니까
도라지 꽃은 어따 쓸려고? 물으신다
그냥 예뻐서요~하고 웃으니 꽃 좋아하시는 시엄니
내 맘 아시는지 따가라 하신다
근데 이 며늘아가 꽃꽂이용으로 가지째 따는 게 아니라
꽃모가지만 똑똑 따는 게 아닌가?
엄니는 며늘이 뭘 하든 믿거라 하시니 더 이상 암 말씀이 없으시다

집에 돌아와서 도라지 꽃을 깨끗하게 씻어 말린 다음
건조기가 있지만 귀찮아서 패스하고
프라이팬에서 조심스럽게 덖어준다
찻잔하나에 꽃 한 송이면 충분하다
처음엔 몸을 풀듯 천천히 맴돌다가 이내 스르르
색이 퍼져 간다

도라지 꽃이 보라색이어서 보라색이 나올 줄 알았는데
잉크 빛 파란 바닷색이다
도라지꽃차를 보면서 나는 시엄니가 떠올랐다

시엄니는 겨우 초등학교 졸업 밖에 못 했지만
본인 앞으로 되어있는 밭떼기도 팔아서
남동생들은 국내 최고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뒷바라지를 하셨다 한다

많은 사람들이 엄니께 전화를 하거나
찾아오거나 하신다
대부분이 다 자기 하소연이고 자기자랑이고
기도부탁들이다
한 번도 그 부탁이나 하소연을 거절하지 못하고
전화를 끊지 못해
가스레인지 냄비도 부지기수로 태워 먹는다

텃밭의 농작물들 중 실한 것들은 다 남의 차지고
못나고 상처 난 것들만이 본인 몫이다
심지어 아픈 몸을 이끌고 배달까지 하신다
대가는 전혀 바라지 않으시고…..

가진것이 없어도 늘 베푸시기만 하는 엄니는
신앙생활을 깊이 하시고 희생정신이 남다르신 분이다
처음에는 너무 자존감이 낮은 게 아닌가 생각되어 졌는데
베풂이 곧 본인이 살아가는 목적이요
자존심이라는데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도라지 꽃차는 별스런 맛이나 향이 없다
그저 제 한 몸 바쳐 소명을 이루고는
오래도록 제 몸에서 파란 물감 같은 색을 내더니
정작 저 자신은 잠자리 날개처럼 투명해진다

재작년 엄니께서는 알츠하이머 판정을 받으셨다
그 좋아하던 텃밭가꾸기도 못하실 정도로
거동하기가 힘들어 대신 며느리인 내가
텃밭을 가꾸고 있는데 올해도
기억을 잃어가시는 엄니의 텃밭 한귀퉁이에
도라지꽃이 피어났다

 

엄니가 더 투명해지시기 전에 뭔가라도 해야 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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