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에 살고 있는 나는 어디를 가든지 바다를 만나면 편안해 진다.
환한 한낮의 뭉게구름 같은 바다에서부터 일몰의 바다, 검정 먹빛의 밤바다는 여유로운 포용으로 내밀한 감정의 나를 회복시키는 이유이다.
실안 해안도로를 걷다가 벤치에 앉아 무심한 듯 바다를 바라보면 아무 욕심이 없다.
가족, 연인, 친구, 많은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주는 마실 터 해안도로와 방파제는 일몰에 혹, 밤이 늦도록 낚시를 하며 외로울 때, 기쁠 때, 슬플 때 회복과 위안의 장소가 된다. 어느 풍광의 순간 내면에 쌓였던 묵은 찌꺼기들이 비워지고 가벼워지는 느낌을 경험 한다
삶의 애환, 위로와 회복의 장소이고 꿈, 자유가 생성되는 쿠바 아바나의 ‘말레콘’ 과 너무 닮아 있다.
카리브 해의 말레콘 방파제 위에서 낚시하는 사람들, 헤밍웨이도 이런 풍광들 속에서 ‘노인과 바다’의 장면을 떠올렸을까?
헤밍웨이가 쿠바에 머물면서 집필한 노벨 수상작인 소설 ‘노인과 바다’ 엔 멕시코 만류에 조각배를 띄우며 홀로 살아가는 늙은 어부 산티아고가 등장 한다.
산티아고는 어려서부터 아프리카로 달리는 범선의 선원 노릇을 하였고 선원 생활 중 폭풍으로 죽음의 위기를 맞이하곤 했지만, 야망과 패기에 찬 사람들이 부르는 소유와 전쟁의 바다 ‘엘마르’ 라고 부르지 않는다.
산티아고는 바다를 ‘라마르’라고 부른다.
‘라마르’ 는 스페인 사람들이 바다를 사랑할 때 사용하는 여성 명사이고 달, 태양, 바다새와 눈물이 뒤엉킨 생의 자궁과 같은 모성의 바다를 의미 한다.
바다를 ‘라마르’ 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바다를 통해 수고와 겸손을 배우고 구원과 용기를 얻으며 안식의 고향이며 어머니라고 말한다.
산티아고는 바다를 ‘어머니 ’라고 부른다.
언제나 변함없는 죽방렴(竹防廉),
자연친화적 방식의 고기잡이, 물살이 드나드는 좁은 바다 물목에 대나무 기둥을 꽂아 바다 속 깊이 흐르는 물살을 가르고 거둬들이는 어획(漁獲)들에 참 지혜를 엿본다.
죽방을 뒤로 하고 있는 지척의 섬들, 지나가는 배, 금오산에 아쉬운 듯 걸터앉은 해,무심한 듯 바라보며 마음을 열고 바다의 언어와 깊은 대화를 한다.
이곳이 산티아고의 바다 ‘라마르’이다
실안 앞 바다가 그렇다.
순간의 감동으로 셔터를 누른 사진에는 비릿한 갯냄새가 베여있고 바다는 각자 살아온 시간과 삶의 경험에 따라 색깔과 깊이를 달리하고 있다.
노을이 머무는 시간은 길지 않고 짧지만, 순간을 마음에 담아 실안 앞바다에 안겨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