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열한 살 때부터 엄마는
쥐치어고기 공장에 일을 다니기 시작하셨습니다. 처음엔 혼자 다니시다가 차츰 우리 육남매의 손길을 바라셨고, 육남매의 둘째이자 큰딸인 나는 살림 밑천이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하셨던 어른들의 바람처럼 시키는 일들에 대하여 무조건 적인 ‘예’라는 대답만을 하게 키우셨던 것 같습니다. 할머니께서는 새벽 장과 오후 장에 나물도 데치고, 열무도 솎아 단을 만들고, 여름이면 옥수수도 삶아서 단을 묶어 나가고……. 저녁 늦게까지 내 다 팔 채소 손질을 하며 꼬박 꼬박 졸기도 한 기억이 있습니다. 고구마 줄기 껍질을 벗길 땐 손가락 모두 까맣게 물들기 일쑤였고, 꾀부릴 줄 모르는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한다며 까르르 웃곤 하시던 어른들……. 돌아보면 ‘나는 지금 나의 아이들에게 어른 부모로서 먼 훗날 실망스럽지 않은 사람이고 싶습니다.’그때는 다들 그렇게 살았다고 합니다만…….
우리 집 막내가 3살 때의 일입니다. 아기의 열 경기를 처음 보았고, 할머니는 아이의 심각함을 인지 하셨고 부뚜막의 큰 정종 병 식초를 물에 타서 아이의 얼굴에 채를 가까이 두고 그 위로 당신의 입속에서 식초 물을 뿜어내셨고, 조금 있다 아이는 가쁜 울음을 터트렸습니다. 그 일을 알리기 위해 엄마가 일하러간 쥐치어고기 공장 ‘해남식품’에 첫 발을 디뎠던 기억납니다.
국민학교 4학년 시절, 유난히 인형그리기를 좋아했습니다. 공책의 맨 앞장과 뒷장의 여백은 늘 여자 인형들과 그들이 입을 옷들로 가득 그려져 있었습니다. 마음 맞는 친구와 한창을 놀고 싶을 그때 엄마는 방과 후의 시간들마저도 생계를 위해 최선을 다하기를 바라셨던 것 같습니다. 육남매의 고사리 손 하나라도 빠질라 챙기셨습니다. 어쩌다가 다른 집 아이들보다 조금 늦을라치면, 그때마다 하는 엄마들의 역성 속에는 “~~누구 똥 빨아 묵어라!”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지만 그때는 그 말에 너무 속상해 하면서 눈물을 찔끔거렸던 기억이 납니다. 처음에는 쥐치어고기 껍질만을 벗기다가 곧 칼을 들게 하고 나중에는 엄마처럼 줄을 서서 차에서 머리에 쥐치어고기 상자를 받아 이게 하였습니다. ‘잘 한다 잘한다하면 지 죽을 줄도 모르고 더 잘하려고 애쓰는 아이’나의 초등학교 시절을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중학교 고등학교시절도 별반 다르지 않은 날들이었습니다. 일을 할 때는 언제나 누가 금방 버린 듯 낡은 옷을 입고도 부끄러움을 몰랐었고 늘 일을 해야 한다는 ‘일하지 않으면 밥도 없고 학교도 못 다닌다.’는 그 말들에 우선하여 방학은 한마디로 ‘엄마의 수입(우리 엄마의 임금봉투)이 두둑해지는 달’피어 본 적도 없는 아이들의 시간은 그렇게 피로에 쌓이고 열손가락 피가 철철 흐르는 한마디로 방학숙제는 사치였습니다.
적어도 내게는 아버지의 여러 번 사업 실패로 엄마가 벌어들이는 쥐치어고기 공장일은 우리에겐 생명 줄 이고 나름 희망이었으며 일한 삯을 받는 날은 귀하던 계란이나 라면을 실컷 먹는 날이었었고, 엄마는 여기저기 꾼 돈을 갚는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나마 남은 논에서 수확한 쌀은 쌀가게에 가서 가격이 싼 정부미와 바꾸어 질 보다는 양으로 우리 집 열 식구 넉넉한 끼니를 채워주시던 기억이 선합니다.
잘 들어가는 아궁이에 청솔가지 마른솔가지 구분 있던가요?
이 말 참 많이 듣고 자란 어린 시절이었습니다 먹성도 먹성이지만 많은 식구들이 같은 자리서 밥을 먹으면 얼마나 잘 먹고 많이 먹었는지, 그때의 분량을 떠올리면 열 식구 매끼를 감당하기엔 엄마의 작은 체구가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래도 준비하는 엄마는 늘 모자랐던 것 같습니다. 밥이 적거나 여분 밥이 없을 때는 엄마는 늘 화가 난다고 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부모 형제 밥을 줄일 수 있었던 것도 아닐 테고 자식들 모자라게 먹이고 싶지 않았을 테니……. 가끔은 이런 말도 들었던 것 같습니다. ‘흉년에 아이들은 배가 터져 죽고 어른들은 배가 고파죽고……’ 이 글을 쓰면서 돌아보니 그리 하셨던 것 같습니다.
어쩌다 길 가다보면 비바람이 잡아채어 휘어진 우산은 지금에 비하면 로또에 당첨된 환한 얼굴 같다고나 할까요? 그냥 지나치는 일이 없었습니다. 쉬이 찢기지 않는 우산 천은 손가락감태의 재원이어서 집에 오자마자 가위로 수 십장을 오래서 손가락 모양으로 기워놓고 뿌듯해 하셨지요, 내 새끼들 손가락에 피 덜나게 하려면 꼭 필요한 보호 장구였으며, 아이들의 열손가락은 늘 닳아서 빨갛게 피멍이 맺히거나 피가 나곤 하였으니까요. 그 시절 어렵게 큰 흔적은 아직도 나를 따라다니며 지문인식기가 있는 자동화기기를 이용하긴 힘든 입장입니다.
겨울이면 재활용 페인트 통에 구멍을 뚫고 통에 장작을 담아 머리에이고 다니며 추운겨울 언 손을 녹여 가며 일을 하였고, 나중엔 들고 다니는 연탄 화로를 껴안고 일을 했었습니다. 그나마 갈수록 좋아지는 일하는 환경에 환해지기도 하였습니다. 공장은 여러 지붕이 잇대어 커다랗게 만들어졌었던지 내가 앉아 일을 하는 위치가 하필이면 그 시린 바람이 지나는 길목 이었던지 나의 왼쪽 볼은 늘 퍼렇게 또는 뻘겋게 되어 있었는데 결혼을 하고 한참 후에야 그 자리가 얼어 동상이 자리한 곳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떻든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 시간을 지났기에 그때보다는 늘 나아지고 있으며 감사하게 여깁니다.
타지에 살면서 고향을 다녀가는 내내 삼천포하면 남양동 입구에서 부터 상하고 역한냄새가 먼저 떠오릅니다.
타향생활 13년을 접고 돌아오는 길, 비릿한 바다내음 속에 자리한 삼천포 쥐치어고기를 비롯한 항구냄새 결국은 그 어떤 황홀한 향수보다 더 나를 이끄는 고향에 취하게 하는 잊지 못해 돌아오게 하는 강력함으로 자리 하는 아프고 시린 기억이지만 가슴에 늘 껴안게 되는 내 고향이며 향수병 치료제였습니다. 감사드리며 지금까지 삼천포의 ‘옛말’을 해 보았습니다. 살면서 가장 좋을 때가 그 ‘옛말’할 때라고 봅니다.
예상치도 못했던 코로나의 일상이 이젠 자연스러운 일상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는 요즘입니다. 힘들고 숨이 턱턱 차오르며 바닥에 닿을 듯합니다.
하지만 그 옛날이 지나갔듯이 지금 여기 우리들도 지나가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온 시련의 가르침으로 일상의 소중함과 그 간절함으로 다시 일어서는 거듭나는 우리들이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에 감사드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