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 속의 비형랑 설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탄생한 ‘비형랑의 낮과 밤’

사천 출신 김인배 작가의 소설집인 ⌜비형랑의 낮과 밤⌟에는 표제작인 중편 ⌜비형랑의 낮과 밤⌟을 비롯하여 ⌜물목⌟, ⌜등대곶⌟, ⌜환상의 배⌟, ⌜독요초⌟ 등 중·단편 5편이 수록되어 있다.

⌜비형랑의 낮과 밤⌟은 ⌜삼국유사⌟ 속의 ‘비형랑 설화’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으로 인간의 한계와 허무의 단면을 드러내 보여주는 액자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작가는 시류(時流)에 민감한 세태나 풍속보다는 일상 속에서 발견하는 인간 본연의 원형적이고 철학적인 문제와 연결시키는 작업을 소설 창작의 주요 모티프로 삼고 있다. ⌜물목⌟의 상징공간과 등장인물들이 그러하고, ⌜등대곶⌟의 무대와 인물들이 또한 그렇듯 일상생활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원형(原型)을 드러내 보여주는 인물을, 그에 걸맞은 상징 공간 혹은 은유적 세계 속에 설정하는 이야기 구조가 되도록 시도하고 있다.

또한, 그의 글에서 물은 에로스의 욕망으로 채워지는데, ⌜물목⌟과 ⌜등대곶⌟에서 이러한 에로스의 세계를 가장 잘 읽어낼 수 있다.

소설 ⌜비형랑의 낮과 밤⌟은 가족과 외딴 곳에 떨어져 살며 소설 창작 작업에 열중하던 주인공은 죽마고우인 신문기자 곽희도가 보내 준 한제민이라는 희대의 ‘대도(大盜)’이자 탈옥범의 수기를 소설로 재구성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소설 속 화자인 작가는 밤과 낮을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설화 속 인물 ‘비형랑’과 ‘대도 한제민’을 대비시키며 인간의 욕망과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또한 작가는 ⌜비형랑의 낮과 밤⌟에서 분절된 세상과의 소통을 힘겨워하는 친구 곽희도를 통해 보잘 것 없는 인간의 한계와 덧없는 삶에 대한 의문을 독자들에게 긴 여운으로 남기고 있다.

“나는 계속 눈을 감고 눈꺼풀 밑으로 펼쳐진 그 바다 앞에서 나만의 몽상에 오래 잠겨 있었다. 그 몽상 속에서 해수관음을 만나려고 오늘도 하염없이 물가를 서성거리는 누군가의 실루엣을 그려보았다. 육지와 바다의 경계선을 시시각각 변경해 가며 찰싹거리는 파도가 시공(時空)을 허물고 지우듯 끊임없이 적시는 해안선을 그가 천천히 걷고 있다.<비형랑의 낮과 밤> 중에서

 

문학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은 소설 ⌜물목⌟

김인배 작가는 소설 속에 순우리말, 고유어를 추구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물목⌟ 의 경우, 한 페이지도 쉽게 넘어가지 않는데, 뜻을 대략 짐작할 수는 있지만 정확히 알지 못하는 사라져 간 순우리말 어휘 때문에 영어 원서를 읽는 것처럼 사전이 필요하다. 소설가에게 가장 큰 힘은 문장력인데, 문장을 이루는 요소가 바로 낱말, 그 낱말을 그는 순우리말로 채우기 위해 무던히 노력해 온 소설가이다.

중편⌜물목⌟은 1982년 12월호 <현대문학>지에 처음 발표되었다. 단순한 의미전달을 넘어선, 서정과 사상이 가장 이상적으로 조화된 소설이라는 호평을 받으며, 그 달의 문제작으로 선정되어 각종 일간지에 소개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조명화’ 감독에 의해 영화화 되었다.

그리고 ‘권영민’, ‘원형갑’, ‘천이두’ 교수 등 그 당시 저명한 문학평론가들도⌜물목⌟에 대해 극찬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권영민(전 서울대 교수이며, 문학평론가)은 “소설 ⌜물목⌟은 ’풍부한 토속적 어휘와 그 어휘들의 적절한 활용, 더 나아가 세련된 묘사, 감동적 주제가 돋보이는 매우 훌륭한 작품”이라고 평하였다. “소설 ⌜물목⌟은 어머니와 딸로 이어지는 운명의 실마리를 원형적인 패턴으로 재구해 봄직한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소설의 제목 자체가 담고 있는 암시성도 그렇고 어머니의 과거 체험과 딸의 현실에 개재해 있는 애정의 갈등도 그렇고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물목’이라는 공간적 배경의 상징적인 무대도 모두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영원히 회귀하는 신화적 공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소설의 결말에 그려지고 있는 극적인 장면은 운명과의 맞부딪침에서 오는 격렬함마저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소설⌜물목⌟이 한정하고 있는 인간의 운명을 떨쳐버리고 싶은 것이 사실이며 새로운 삶에 기대를 걸어보는 것입니다. 바로 이 점이 이 작품의 매력이기도 합니다. (권영민 문학평론가의 이 달의 소설 작품 평론 중에서)

  원형갑 문학평론가는 ‘사라져가는 겨레말을 찾아 나섰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였다. “1900년대 이래의 신문학사를 통해서 우리는 그렇게 많은 주의·사상을 만나고 돌아왔지만 정작 작가의 사명의 하나인 겨레말 찾기에 있어서는 생각마저 미치지 못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물목⌟에 이르러 비로소 우리는 그 잊혀져가고 있는 겨레말의 산 맛을 만나게 된다. 전혀 쓰는 일이 없게 된 귀에서도 눈에서도 사라져 버린 구슬 같은 낱말이 마치 2차세계대전 후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히브리어를 찾아 나섰듯이 또는 에이레 사람들이 그들의 모국어를 건져 냈듯이 이 중편 속에 엮어져 나오고 있다. 한자어 투성이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이런 겨레말을 만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마치 스스로의 사랑(고향)을 만난 것처럼 기쁨이며, 고마움이 아닐 수 없다” (원형갑의 이 달의 소설 평론 중에서)

  천이두 문학평론가는 “강물이 작품의 라이트모티프를 이루고 있고, 그런 점에서 다분히 신화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점도 그렇거니와 특히 애써 많은 토속어들을 동원, 구사함으로써 각종의 그러한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부각시키려 하고 있는 점도 이 작가의 실험적인 야심을 반영하는 면이라 하겠다.

<울가망하던 지난 세월동안 오래 뼈물던 화풀이를 그녀가 시시부지 넘길 속셈이 아니란 걸 눈치 차린 탓인지 사내는 비열할 정도로 용서를 빌며 시르죽은 엄살을 떨었다. 야젓잖은 그런 태도가 묘련의 눈에는 여북 씨식잖게 느껴졌으면 애당초 그가 엄펑스럽게 몽짜를 치는 줄 알고 절대로 용서치 않으려 했을까!> 이 작품에는 이런 토속어가 주류를 이루면서 한 많은 한 모녀의 기다림과 갈망의 이야기가 펼쳐져 나간다. 필자로서는 이 작가의 이런 실험적인 노력에 충분히 호감이 간다.“( 천이두의 소설 평론 중에서)

이처럼 김인배 작가의 글에서는 모국어 사랑과 어휘 하나하나에 정성을 기울인 노력들이 돋보인다. 줄거리 위주로 쉽게 읽히는 서사 중심의 글이 아니라 아름답고 세련된 묘사 위주의 문체가 독자로 하여금 언어의 마법 속으로 빠져 들게 하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안개는 너무 깊고 유수(幽邃)하여 등대의 불빛이 그 으늑한 안개에 가려 희미한 달무리로 보였다. 낮에는 햇살에 반사되어 눈부실 정도로 순백의 빛깔이었던 등대 뒤로 밤엔 또 언제나 파멸을 노리는 검은 해신의 휘적대는 손길같이 굽이치는 파도의 음산한 해조음과 더불어, 등대는 거대한 그림자로 어른거렸다.” <등대곶>중에서

“나를 에워싼 주변의 나뭇잎들과 풀잎사귀들의 나지막하고 자잘한 숨소리를 느낄 때까지, 혹은 그것들이 속삭이는 존재의 비의(秘意)를 듣고 싶은 듯이, 나는 귀를 한껏 열고 황톳집 창틀에 턱을 괸 채 앉아 있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창 너머 마당에서 꽃 지는 소리 또한 마음에 새겨 담듯 고개를 숙이고, 떠나간 사람들을 생각해 보았다. 잘 가라, 친구야, 나는 속으로 희도에게 작별을 고했다. 세상의 모든 주변적인 것들이 실은 모두 중심이었다는 사실을, 산과 들, 길섶의 어디서나 흔하디흔하게 피어 있는 저 숱한 풀꽃들이 일깨워주었다.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아도 살아 있는 것들은 기어이 저 홀로 아름답게 생을 완성하며 제가끔 한 목숨을 살다 가는 것이었다. 하늘 아래 이 지상엔 쓸모없이 하찮은 너스래미 같은 존재는 하나도 없다는 생각을, 나는 저 이름조차 다 알지 못하는 풀꽃들을 보면서 곱씹고 있었다. 지나가며 모든 것을 다 드러내 보여주는 ‘시간’이 내 집 뜰에서는 존재의 비의를 소곤거리며 보여주는 듯하였다. <비형랑의 낮과 밤> 중에서

나는 이 부분을 읽으면서, 코끝을 찡하게 하는 슬픔인지 아픔인지 모르는 무엇인가가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아마도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그의 부재 탓인지 모른다. 또한, 작가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이 여실히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작디작은 풀꽃 한 송이도 허투루 피지 않고, 알아주든 모르든 홀로 한 생을 살다 가는 것이라는 것을. 작가도 이승을 떠나 세상 밖으로 사라졌지만 홀로 치열하게 살다 간 그의 삶을 나는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소설가 김인배> (1948~ 2019)

사천(삼천포항)출신, 1975년 문학과 지성에 소설 ‘방울뱀’으로 등단. 1980년대 ‘작가’ 동인으로 활동함. 1982년 현대문학에 중 편 ‘물목’이 그 해의 소설로 선정되고, 조명화 감독에 의해 영화화 됨.

⁍ 소설집 : ‘하늘궁전’, ‘문신’, ‘후박나무 밑의 사랑’, ‘비형랑의 낮과 밤’, ‘바람의 끝자락을 보았는가’ ‘오동나무 꽃 진 자리’, ‘열린 문 닫힌 문’ 등

⁍ 우리말 연구서 및 한일 고대사 연구서 : ‘전혀 다른 향가와 만 엽가’, ‘일본서기 고대어는 한국어’, ‘고대로 흐르는 물길’, 역설의 한일 고대사 任那新論’, ‘일본천황가의 한국식 이름 연구 神들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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