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 가산리 석장승

서포대교를 지나 곤양 IC 남해고속도로 달리다 축동 나들목을 빠져 나와 가산리 가산마을 을 찾았다
마을 입구에 가산마을을 알리는 표지판에는 환영하며 반기는 목장승이 서 있다 곧장 조금 더 들어가면 남(男)장승 한 쌍과 여(女)장승 한 쌍이 서로 마주보며 각기 품은 기운을 세상에 꺼내어 시대에 맞게 역할을 다하고, 지금도 묵묵히 전설처럼 서 있다.

이곳 가산리는 조선시대 사천· 진주· 곤양· 하동· 단성· 남해· 고성· 의령에서 조세로 거둔 곡식· 면포와 특산물을 이듬해 봄에 한양으로 실어갈 때까지 쌓아두던 가산창(駕山倉)이라는<조창(漕倉)> 있었으며, 조선 영조 36년(1760)에 설치되었다.

육로와 수로가 두루 좋아 물품을 끌어 모으기에 안성맞춤이었고, 가화강과 사천만이 만나 남해안·서해안을 거쳐 한강 하구까지 오가는 바닷길과도 곧바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뱃길보호와 지역의 안녕을 기원하며 이곳에 돌장승을 만들어 세웠다고 하는데. 이들 장승은 조창이 폐쇄 된 이후 원래의 역할 대신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3호로 경남 사천시 축동면 가산리 626-1번지에 위치)

 

몇 해 전 코로나가 발생하기 전 처음 가산리를 찾았을 때는 가산 오광대를 구경하기 위함이었다. 내가 사는 가까운 곳에 이런 신비를 간직한 흔적들과 놀이가 있다는 것이 정말 자랑스러웠다 그래서 마을을 꼼꼼히 살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기억들이 나를 그곳으로 다시 이끌었다.

석장승들을 좀 더 가까이서 꼼꼼히 들여다보며
무수히 많은 일들이 스쳐갔을 세월 속, 그때를 상상하며 눈을 감아본다

 


마을 어귀의 남장승 2기는 묘 앞의 문인석과 비슷한 형상으로 관모를 쓰고 조복(朝服)을 입었다. 양손은 가슴 앞으로 모아서 홀을 쥐고 있다. 뒷면까지 상세히 조각한 환조(丸彫) 형태로서 옷 주름까지 사실적으로 조각하였다. 눈과 귀가 크며, 입은 다물고 있고, 어깨는 약간 올라가 있다. 오른쪽 장승의 키가 더 크며, 왼쪽 장승의 턱에는 굵은 수염이 나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현재의 공간과 시간을 벗어난 완전히 다른 세계가 전개된 듯하다
여전히 입을 꾹꾹 다문 석장승은 넓고 깊어지라 말하는 것 같았고….

 

남장승을 마주보고 있는 2기는 머리에 상투를 틀고 관복을 입은 여장승이다. 눈썹이 짙고, 큰 귀. 이에 비해 입은 작다. 머리에 2개의 상투를 튼 모습과 긴 장옷을 입고 모아 쥔 두 손에 홀을 들고 있으며, 얼굴은 둥글고 눈은 돌출되었다. 여기 여장승은 도둑맞아 1980년 다시 세운 것이라고 한다.

 

​조창에 물품을 운반했던 수없이 많은 사람들, 소달구지 왁자지껄한 소리들, 이곳을 지날 때
지켜보았을 이 길에 나도 서 있다.

 

마을 중앙 당산나무가 있는 벅수골에는 남녀 석장승이 산비탈의 계단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다. 이 남장승은 전반적으로 마을 어귀의 남장승과 비슷한 형태이다. 오른쪽 남장승은 수염이 없지만 왼쪽 남장승은 굵은 수염이 세 줄기로 나 있다.

 

벅수골의 장승은 가산리 마을의 구석구석을 정화시켜주는 청정한 기운을 담뿍 품고 있는 듯하다.

 

마을 중앙 여장승 2기는 느티나무 아래에 동자상 형태로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여장승 2기는 .마을 입구의 여장승들과 비슷한 형태이다. 여장승 역시 조복을 입고 손에 홀을 들었다. 특이하게도 머리에 뿔과 같은 돌출부가 2개 솟아나 있다. 왼쪽 여장승의 오른쪽 뿔은 잘려나간 흔적이 있다. 눈썹이 짙고, 큰 귀를 하고 있으며, 눈과 귀에 비하여 입은 작다.

 

고요함이 있다
바람 속에도 나뭇가지 속에도 풍물 속에도 사천만의 바다에도
오랜만에 찾은 가산리 마을은 여전히 평화롭고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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