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007

얼마 전에 007 영화를 보았다. 아주 어릴 적부터 보아왔던 시리즈물이니 그 햇수도 엄청나다. 어릴 적 아빠의 책꽂이에 주르륵 꽂혀 있던 책들 중에는 ‘장길산’이나 ‘토지’, ‘임꺽정’ 등… 많은 책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영화 007 시리즈가 책으로도 나와 있었다.

‘007 골드핑거’, ‘나를 사랑한 스파이’, ‘007 옥터퍼시’ 등…

흥미진진한 얘깃거리들을 가끔씩 TV에서 영화로도 보면서 상상하며 읽을 수 있으니 더 재미가 있었던 것 같다. 가끔씩 나오는 야한 이야기에는 혼자 얼굴이 붉어지는 사춘기 여자아이의 모습도 들어 있다.

그렇게 나는 아빠의 책장에 꽂힌 책들을 하나씩 읽어나가며 책 읽기에 몰두할 수 있었고, 책을 통하여 무한한 상상의 세계로 입문할 수가 있었던 것 같다.

아빠는 10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몇 해 전에 나한테 이메일 보내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셨다. 내가 “아빠 아이디는 뭐로 하실 거예요?”라고 물었더니 아빠는 좀 쑥스럽게 웃으며 미리 정해 놓은 게 있다고 하시면서 ‘보헤미안’이라고 하셨다. 차마 근엄한 아빠의 면전에서 웃지는 못했지만 나는 속으론 좀 놀랐다. 초등학교 교사셨던 아빠는 좀처럼 감정 표현을 잘 하지 않으셨고 무뚝뚝하기가 이를 데가 없으셨던 분이셨다. 그런 아빠에게도 가슴에는 보헤미안의 꿈을 꾸고, 007 시리즈 책과 영화들을 보며 경직되고 정형화된 교사직에의 일탈을 꿈꾸고 있었던 걸까? 007의 가장 대표적인 배우인 로저 무어가 몇 년 전에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나는 마치 친한 가족 누군가의 죽음처럼 애도를 하였다.

책 읽기를 좋아하셨던 아빠는 가족에게는 무뚝뚝하셨으나 주변 사람들의 평가는 조금 달랐다. 가을이면 트렌치코트를 입으시는 멋쟁이셨고, 시도 잘 쓰시는 낭만적인 분이셨다고… 어릴 때 사춘기 딸과의 데이트를 어찌할지 몰라 그 당시 우리 동네에서 핫하던 ‘라라 분식’에 데려가 처음 오므라이스를 사준 아빠, 자전거 뒤에 태우고 딸기밭에도 데려가 주셨던 아빠…

돌아가시고 유품을 정리할 때 몇 권의 일기장과 메모와 시들… 비록 보헤미안처럼 살지는 못했지만, 낭만을 가슴에 품고 사셨던 아빠의 기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에게는 또 한 분의 007 배우셨던 아빠를 추억한다.

“그러니 이 사람을 기꺼이 맞아 주시오.
이 사람은 자유를 찾아서 가고 있소.”

– 단테, 신곡 연옥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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