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남동 블루스 두 번째 – 소소한 일상, 일상적 행복

게으름이 도지는 나른한 가을 오후.

10월임에도 난, 선풍기를 옆에 끼고 느직느직해진다.

밤새 시달린 모기 때문에 잠도 부족하고, 긁적긁적 안 간지러운 곳이 없다.

아침 산책길에서 본 호랑이 할머니네 논에는 벼가 조금씩 고개를 숙여가고 있었다. 우리 집 마당을 생각하니 조바심이 났다. 급히 마당으로 나가 텃밭을 살펴보았다. 모기의 공격과 뜨거운 햇살에 다시 집안으로 피신을 했다. 진한 커피 한 잔을 내려 마시고 다시 그 열기에 시원한 탄산수 반 통을 비우고서야 바짝 정신이 들었다. 마당을 노려보며 오늘 안에 다 끝내버리겠단 비장한 각오로 완전 무장을 시작했다.

긴바지, 긴 셔츠, 챙모자, 장갑, 장화까지 완착!

쓱싹쓱싹. 실톱으로 오디나무부터 잘라냈다.

게으른 주부라 종종 곰팡이가 펴서 버려지는 음식들이 생기곤 한다. 그러면 종량제 봉투 대신 텃밭에 묻어 버리곤 한다. 텃밭에 버려진 오디에서 세 개의 싹이 나서 어느새 옥상 높이까지 자라 있었다. 씨앗에서 싹을 틔운 과실수는 10년 정도가 되어야 열매를 맺으니 뽑아버리라고 시아버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기대감으로 한 그루만 남겨두기로 했다. 양손이 검은 물로 가득 찰 때까지 오디를 따 먹을 수 있길 바라면서. 가지치기로 작아진 오디나무에 덕에 집이 훨씬 넓어진 것 같다. 이젠 잘 말려서 버리는 것도 일이다. 작았을 때 미리 손봤다면 폐기물처리 마대 2장은 아낄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텃밭의 잡풀을 호미로 캐어내고 무게를 못 이겨 땅에 코를 박고 있는 국화는 밧줄로 묶어 세워주니 풍성해져 더 어여뻐진 것 같다. 작년에 잘라낸 무화과나무 밑동에서는 새순이 올라와 있었다. 지난달 수정 쌤의 글과 무화과 파이 사진을 보며 다시 무화과나무를 살려볼까 고민하며 큰 가지 몇 개는 남겨두었다. 개량종 무화과는 크고 당도도 높아 맛났지만, 벌과 벌레들이 너무 많이 찾아오는 단점이 있어서 베었던 건데 요렇게 또 욕심이 난다. 새로 과실을 보려면 앞으로 2, 3년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지만.

텃밭 정리를 대충 마치고 마당을 보니 나름 흡족하면서도 아직도 해야 할 일들이 많이 남아있다. 아직 정리하지 못한 풀장, 여름 습기로 곰팡이 가득한 외벽, 마당 곳곳의 잡풀들이 눈에 들어온다.

잠시 숨 고르기도 하며 요즘 나의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 ‘갯마을 차차차’를 돌려본다. 갑자기 내린 소나기에 홍반장이 혜진의 손을 잡아 이끌어 바닷가로 달려갔다. 쏟아지는 폭우 속에 자신을 끌고 온 홍반장이 못마땅해 쳐다보자 홍반장이 혜진에게 말했다.

 

‘갯마을 차차차’ (tvn) 중 

“소나기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어. 이럴 때는 어차피 우산을 써도 젖어. 이럴 땐 에이 모르겠다 하고 그냥 맞아버리는 거야! 그냥 놀자, 나랑.”

언제부턴가 조급해지기만 하고 뭔가를 딱히 성취해서 해내는 것도 아닌 것 같아 계속 조바심이 났던 터라 이 대사가 위안이 되어주었다.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너 하고 싶은 거하고 쉬엄쉬엄해.”

극 중 홍반장이 나에게 이렇게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마당에 해야 할 일들은 오늘이 아니면 내일 해도 되는 일이고 또 안 한다고 큰일 나는 것 하나 없다고 생각하니 한없이 느긋해진다.

단정해진 텃밭의 국화가 눈에 쏙 들어온다. 국화가 활짝 피어나면 국화차를 만들어 보자. 한 번도 만들어 본 적이 없지만 홍반장처럼 다재다능한 지인이 있어 아마도 뚝딱 해결해 줄 것이다. 향긋한 국화차를 생각하니 벌써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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