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산한 바람에 잠을 깬다. 습관처럼 열어두었던 창틈으로 불어오는 바람의 온도가 예전 같지 않다. 여름 동안 풀어졌던 몸이 가을의 선선한 바람에 움츠러든다. 창문을 닫고 이불을 여미며 다시 누워도 밀려오는 서운함에 잠이 오질 않는다.
아주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한 계절을 보내고 새로운 계절을 맞을 때마다 추억이 먼저 찾아온다. 예전에 보냈던 가을의 일상이 그려진다. 어린 시절, 시골에서 부모님 따라 가을걷이를 돕고 언니들과 뒷산을 돌며 알밤이나 도토리를 줍거나 들판에서 방아깨비를 잡으며 놀았다. 당연히 지금은 각자의 자리에서 바삐 지내고 있기에 만나기도 힘들고, 함께 그런 일을 할 수도 없다. 추억만 남고 온기를 나눌 수는 없으니 몸이 서운함을 느끼는 것이다.
무엇을 하면 좀 나아질까 생각을 해보니 그 시절에 먹었던 흑임자죽이 떠올랐다. 흰 참깨는 기름도 짜고 깨소금을 만들어 오래도록 먹지만, 검은깨로는 바로 죽을 만들어주셨는데 그 고소함이 떠오른 것이다.
“깨를 찌다”
마침 올해는 친구들과 깨 농사를 지었다.
처음 심는 두 명의 친구는 나름 베테랑인 친구에게 배워서 심었다. 한 도랑씩 맡아서 3 도랑을 심어나가는데 베테랑인 친구가 엄청난 속도로 먼저 나아가고 있었다. 역시 배운 사람이 빠르고 잘 하는구나 싶었는데, 같은 방식으로 하는 게 아니었다. 두 명의 친구는 구멍을 내서 씨앗을 2~3개를 일일이 넣고 있는데, 혼자서 비닐 위에 씨를 엄청나게 뿌리더니 구멍으로 밀어 넣고 대충 덮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리하면 어쩌냐고 따져 물으니 원래 솎을 거라 괜찮다고, 자기가 허리가 아파서 일일이는 할 수 없다고 하였다. 베테랑이라고 다 믿을 건 아니구나 웃으며 일을 마무리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친구의 도랑만 엄청나게 많이 나와서 솎는 데 며칠이 걸렸다. 도대체 얼마나 뿌렸나 궁금해서 세어보니 8~10개가 대부분이었다. 씨도 엄청나게 뿌리고 우리를 엄청나게 웃게 해주었다.
그래도 다들 잘 올라와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다. 8월이 넘어가니 잎이 떨어지고 열매가 굵어졌다. 그러다 줄기가 말라가면 거두면 된다고 하여 낫으로 베어냈다.
장마철 비를 피해 사무실을 이용하였다. 볕이 나면 밖에서 말리고 비가 오면 안에서 말렸다. 그런데 밖에 내놓기만 하면 지나다니시는 어르신들이 “어디서 그리 깨를 찌어왔어?”라고 물어보시는 거다. 전라도에서 온 나로서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 그냥 웃어 보였다. 나중에 지인에게 물어보니 낫으로 베는 것을 찐다고 표현한다고 하셨다. 잘 말린 깨는 톡톡 두드려주면 씨앗을 쏟아 낸다.
‘공유텃밭’답게 나온 수확물은 함께 농사지은 사람들끼리 나누었다. 500g 정도 통의 씨앗을 심어 4명이 3kg을 넘게 나눴으니 20배가 넘게 나온 것이다. 농사의 즐거움을 느끼는 순간이다.

“흑!임자~ 이젠 따뜻한 계절을 보내자구~”
드디어 때가 되었다. 농사지은 검은깨로 죽을 만들어본다. 찹쌀과 검은깨를 불려서 믹서기에 간 후 저어주면서 끓이면 완성이다. 소금과 설탕으로 간을 맞추고 아몬드를 넣어 고소함을 더했다. 음식 솜씨가 들쑥날쑥한 편이라 긴장이 되었지만, 가족들은 맛있다는 표현을 아끼지 않고 잘 먹어주었다. 죽으로 얼마나 배가 부르겠냐 싶지만 내 마음이 든든해졌고, 내 정성으로 가족들을 채워줬구나 싶어 뿌듯하기도 하였다. 멀리 언니들에게도 사진을 보내주고 자랑을 했다. 어린 시절 막둥이가 이 정도라고. 내 걱정 하지 말고 다들 건강하시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