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에서 만나”
주말 아침 6시, 친구에게서 전화가 온다. 밭일하러 가자고. 조용히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텀블러에 믹스커피 2봉지를 넣어서 진하게 타고 냉장고에 있는 참외, 식탁 위에 과자를 가방에 담는다. 냉장고 손잡이 옆에는 ‘밭에 감’이라고 눈에 띄게 메모지를 붙여둔다. 가족들은 미동도 없이 단잠을 자고 있다.
자동차로 텃밭까지 15분 정도 이동하는 길옆에는 하천이 흐르고 있다. 새벽녘 물안개가 차올라 세상은 온통 하얗다. 창문을 열어 들어오는 선선한 기운에 여름을 잊게 된다. 일상 속에서는 여름 한낮의 뜨거움만을 알고 있었는데 이른 아침, 열린 창문으로 들어와 팔에 감기는 냉기가 낯설다. 내가 알지 못할 뿐 세상은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었구나. 어린 시절, 눈이 떠지기도 전에 농사일을 나가시던 부모님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눈을 비비며 일어나려 하면 ‘한숨 더 자라’, ‘잠깐 밭에 다녀 오겠다.’며 이불을 덮어주고 머리를 쓰다듬고 나가시던 엄마. 그 길을 내가 나서고 있구나 묵직함이 얹어진다.
차에서 내리면 아직도 풀에 이슬이 송알송알 맺혀있다. 친구들은 먼저 와 있다. 매일같이 통화를 하지만 무엇을 하는지 늘 궁금하고, 보고 싶은 친구들이다. 4년 전, 사천에 사는 80년생 동갑 친구들끼리 모여보자며 만남이 시작되었다. 5명이 모였는데 전부 결혼이주자들이었다. 결혼을 통해 사천으로 오게 되면서 느꼈던 것들, 아이들을 키우며 힘들었던 이야기들을 나누며 동갑이라 더 편하게 친해졌다. 텃밭을 가꿔보자고 3명의 친구가 힘을 모았지만, 나오는 작물의 몫은 그 이상이었다. 자기만이 아니라 나눔을 실천하는 친구들이라 마음부터 든든하다. 든든함 믿고 시작한 텃밭.
300평 텃밭에는 꽃과 함께 다양한 작물들이 있다. 꽃을 키우는 친구의 밭엔 수레국화와 금잔화가 수시로 꽃을 피워낸다. 작년에 심었던 코스모스도 곳곳에서 자라나서 한자리로 옮겨 심었다. 꽃밭이 중앙에서 예쁘게 눈 호강을 담당하면 나머지는 일용할 채소들이다. 작년 멧돼지가 헤집어놔서 포기했던 고구마를 물가 쪽으로 심어놓고, 고추와 땅콩을 심고, 산 쪽으로는 깨를 심었다. 구석엔 토란을 심고 주변으로는 옥수수를 심어서 울타리처럼 해놓았다. 오늘의 할 일은 열심히 풀을 메는 것이다. 해가 뜨거워지기 전에 작물들이 살기 편하게 풀을 제거해야 한다. 한 친구는 호미를 이용하고, 한 친구는 장갑 낀 손으로 잡히는 대로 뽑아낸다. 풀 메는 방법도 다르고 사는 모습도 다르다. 다른 생활을 하며 다르게 선택하는 일상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서로가 다르지만 그래서 다행인 마음들을 나눈다. 풀도 뽑고 근심도 뽑아내는 시간.
‘꽃 보듯 너를 본다’
이슬이 걷힐수록 땀이 주르륵 내린다. 해가 나고 굽었던 허리를 펴고 쉬어가는 시간, 집에서 싸 온 간식을 나눠 먹는다. 작은 실개천이지만 물 흐르는 소리가 시원하고 바람이 좋다. 배도 부르고 땀도 식히며 가만히 앉아 작물들을 보자니 꽃들이 예쁘다. 호박꽃에는 부지런한 벌들이 모여들었다. 노란 호박꽃은 세상 이름난 꽃보다 더 매혹적인가보다. 고구마꽃은 보라색으로 상쾌하게 연주하는 나팔같이 곱다. 새초롬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깨꽃도 은은한 향이 퍼진다. 다들 예쁘구나. 비교하고 경쟁하지 않아도 꽃은 자기대로 각자 다 아름답구나.
얼굴이 타서 까매지고 주근깨가 늘어 걱정이라는, 흙과 땀으로 범벅이 된 친구들의 얼굴이 예쁘다.
집에 오는 길엔 가족들에게 보여 줄 꽃을 한 아름 갖고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