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눈이 내리던 날의 몽상

멀리 간 객지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어느해 봄인지 겨울인지? 몽롱한!
어느해 봄인지 겨울인지, 철 늦은 눈이 내렸다. 귀한 서설이었고 신발을 덮을만한 폭설이었다. 냉이캐던 동네가 순식간에 눈에 묻혀 거북이가 되었고 아이들은 토끼처럼 깡충깡충 뛰어 다녔다. 자동차가 걸리적거려 나는 해태거리 어디쯤 야트막한 비탈에서 비닐포대로 만든 새 차를 타고 놀았다. 굳이 브레이크를 밟지 않아도 될 만큼 적당히 기운 골목에는 나 말고도 아이 여럿이 뒤따르며 펄럭이는 눈을 잡으려 까치발을 올리곤 했다. 어느새 하나 둘 아이들은 제 길을 찾아 골목사이로 떠나갔고 나는 화어(花魚 꽃모양으로 만든 마른 생선)를 꾸미던 골목을 지나 가로로 이어진 큰길을 건넜는데 그때부터 급격히 줄어든 경사는 더이상 비닐 자동차의 동력을 앗아가 버렸다. 생선들이 빨래처럼 내걸린 어판장 천막 사이 어디쯤에서 하는수 없이 차를 버리고 바짓가랑이에 숨어든 눈을 털어내며 터벅터벅 걸었는데 멀리 온줄도 모르고 바다에 닿았다.

남촌이 궁금했던 것일까?
눈을 머금은 바다가 솜털처럼 뽀송뽀송하였다. 소복이 눈을 이고 앉은 배들이 좁은 어깨를 비비고 있었다. 그 소리가 아랫목에 누운 형제들 같아서 따스했다. 남촌이 궁금했던 것일까? 고향사람을 만나고 싶었는지 떨어지지 않으려고 딱 제만큼의 공간을 차지한 눈들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등대 앞 방파제까지 고샅처럼 차곡차곡 눈이 내렸는데 낯선 세상으로 무사히 가라는 듯 바다는 크게 나무라지 않고 제 마당을 내어 주었다. 하얀 눈 머금은 바다위로 갈매기들이 전령인냥 날아오고 새벽을 헤치며 출항하는 배 사이로 더러 지난밤에 나간 배들이 꽃을 가득 싣고 돌아오고 있었는데 아직 눈은 남아 있어서 파시에 내놓은 생선들이 새순처럼 선명한 등을 드러내고 있었다. 파랬다.

 

꽃잎을 우려낸것 같았다
여명의 바다는 은파처럼 일렁거렸다. 일찍 문을 연 은파다방 커피는 봄바람처럼 순하고 진했다. 창 너머 파시에 남겨진 눈위로 붉은 핏자국들이 낭자했지만 비린내는 달달했고 흥정은 마담이 틀어놓은 팝송처럼 촉촉했다. 어느새 멀리 온 봄 바다 식구들은 리어카나 물차에 실려 뿔뿔이 객지로 떠났고 차곡차곡 배를 포갠 리어카 너머 노산의 밤이 이불을 개고 있었는데 눈인지 꽃잎인지 흩날리고 있었다. 나는 커피 한잔을 더 시켰다. 이번에는 설탕을 빼달라고 했다. 산미가 담백한게 꽃잎을 우려낸것 같았다.

 

봄이 눈처럼 날렸다
그날 저녁 너무 피곤해 곤한 잠에 빠졌는데 꿈에 모든 배들이 하얀 눈을 가득 싣고 항구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눈을 퍼서 해태거리 골목골목에 부려놓는것이 각산 언덕배기에서도 내다 보였다. 어느 순간 눈은 꽃으로 변했고 망산과 노산에는 벚꽃이 눈처럼 날렸다. 아이들은 우산같은 풍선을 타고 항구를 유영하였다. 거북이도 오간데 없고 온 마을이 다시 토끼로 가득하였다. 쥐치도 풍년이어서 아이들 공납금은 제때 냈고 포로 환생한 쥐치는 짭조름한 해풍을 품은채 경주 황룡사지 앞 할매손에 안겨, 수학여행 온 조무래기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궁터에도 봄꽃이 눈처럼 날렸다.
앗 지각이다. 그날 아침에도 두번째 눈이 내렸는줄 알았는데 벚꽃만 눈부셨다. 길바닥에 내린 꽃눈이 자동차 바람에 흩날렸다. 멀리간 객지들이 오고 있는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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