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 여행자의 시선_걸으며 생각하며 Ep.8
가을, 그 설렘 속으로(2)
이순신 백의종군로(사천구간) 2, 다솔사입구~맥사리 예미골
글・사진 조영아
“내가 최우선으로 꼽는 걷기의 매력은
머릿속의 소란함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이다.
걷기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나 자신과 조용한 대화를 하며 천천히 심사숙고할 자유를 준다.”
– 셰인 오마라의 [걷기의 세계] 중에서 –



가을, 그 설렘 속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다
3주 전, 가을이 더 깊어진 후에 걸으려고 남겨둔 반절의 길을 오늘 걸으련다. 동서남북이 가을가을하다. 볏논에 벼는 한층 더 여물었고, 붉은빛 선명한 석류는 농가 담장 위에서 나그네를 유혹하고 있다. 불어오는 바람에 여린 갈대는 물결치듯 일렁이고, 따가운 가을 햇살에 곡식과 과일이 옹골차게 영글어가는 아우성이 여기저기서 들리는 듯하다. 이렇듯, 시월의 한낮은 가을로 찬란하게 물들고 있었다.


#소소한 에피소드1_호경 갤러리
다솔사 입구 삼거리에서 출발하여 얼마 안 가니 길옆에 예사롭지 않은 석상들이 눈에 띈다. <호경 갤러리 석물 민속품 판매 정원 아트>. 갤러리 벽에 비뚤비뚤 써 놓은 손글씨가 이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를 짐작케 한다. 동자승 석상부터 부처상까지, 코끼리나 개구리 같은 동물상부터 맷돌과 절구까지, 심지어는 외국에서 들여온 석상들까지 종류가 다양하다. 갤러리 내부로 들어서니, 온갖 오래된 민속품들이 먼지와 함께 켜켜이 쌓여 있다. 와우, 대단하네! 탄성이 절로 나왔다.
구석구석 꼼꼼히 둘러보며 사진을 찍고 있는 나에게 주인장 어르신이 말을 건네신다. 이분은 짚풀 공예가 최호경 씨! 예전에 TV 프로그램 ‘세상에 이런 일이’에도 나오고, 신문에도 여러 번 소개된 적이 있으셨단다. 증빙이라도 하듯 낡은 신문 하나를 내밀어 보이신다. 아, 꽤나 유명하셨던 분이시구나! 근데 짚풀 공예 이야기를 꺼내니, 손사래를 치시며 “짚풀 공예는 힘들어서 아무도 안 해! 아무도 안 사! 이제 짚풀 공예는 안해요, 먹고 살아야 하니까….” 하신다. 그리고는 짚풀 공예품도, 본인의 모습도 사진을 찍지 말라고 하신다. 농업기술센터 같은 데서 체험 프로그램을 해 보시는 건 어떠시냐고, 여러 말로 전통 공예 기술을 이어 나가 주실 것을 권하였으나, 어르신은 고개를 돌리신다. 무엇이 이 어르신의 마음 문을 저리도 굳게 닫게 했을까?


도롯가에도, 농가 담벼락에도 가을이 짙게 내려와 앉았다
추동마을, 오사마을을 지나 공군부대가 있는 곤양 읍내로 향한다. 갓길이 없는 찻길이라 안전에 매우 유의하여야 한다. 도롯가에는 자동차 외에도 조심해야 할 것이 하나 더 있으니, 바로 은행나무 열매다! 곳곳에 지뢰처럼 널려 있는 은행나무 열매를 피해 걷는 일도 만만찮다. 그리 조심을 했건만 은행나무 열매 파편이 신발 여기저기에 덕지덕지 붙어 있다. 나중에 차 안을 가득 채울 이 고약한 냄새를 어떡하면 좋으랴!


#소소한 에피소드2_cafe 서정리
‘닭장뷰’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사실, 내 맘대로 지어낸 말이다. 공군부대를 지나 곤양 읍내로 들어가는 길목에 흔치 않은 닭장뷰를 감상할 수 있는 예쁜 카페가 새로 문을 열었다. cafe 서정리! 분명 ‘곤양면 서정리’라는 주소를 따라 지은 이름이리라! 아침에 내린 원두커피가 텀블러에 아직 많이 남아 있지만, 호기심에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간다. 짐작한 바대로 카페 사장님은 구면이다. 얼마 전까지 같은 건물 2층에 있는 아동센터에서 일하셨던 선생님이시다. 일전에 한 번 들렀을 때 아동센터 인테리어가 예사롭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이런 예쁜 카페를 만드셨구나! 깔끔하면서도 감수성 듬뿍 묻어나는 카페 분위기와 단아한 주인장의 자태가 참 잘 어울린다. 지나는 길이 있으면 한 번 들러보아도 좋을 것 같다.


어렵사리 응취루에 닿다!
카페를 나와 곤양 읍내로 향했다. 이순신백의종군로 사천구간 종합안내판이 곤양면 행정복지센터 주차장 입구에 쓸쓸히 서 있었다. 아무도 관심 없어 보이는 빛바랜 설명문을 꼼꼼히 읽는다. 왠지 미안함에 조금 더 오래 머문다. 근데, 응취루는 어딨지? 정보를 검색해도 찾을 수가 없어 곤양초등학교를 향했다. 학교 교정을 구석구석 둘러보아도 보이지 않아 지나가는 아주머니께 물으니, 방금 갔던 곤양면 행정복지센터 뒤뜰에 있단다! 살짝 기운이 빠졌지만, 덕분에 100년 역사의 곤양초등학교를 제대로 구경하지 않았는가.
응취루(凝翠樓)는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을 하던 중 머물렀던 곤양읍성 객사의 출입문으로, 원래 곤양초등학교 내에 소재했었으나 1963년 철거된 것을 터를 옮겨서 복원했다고 한다.(출처: 사천시청 홈페이지) 현재는 곤양면 성내공원의 맨 끝에 있다. 어렵사리 찾은 응취루에 올라 보니 곤양 읍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자연 풍광도 좋고 복원된 응취루도 멋지건만 찾는 이는 거의 없어 보인다. 덕분에 널찍한 응취루 마루를 독차지하고 잠깐의 호사를 누린다.
이순신백의종군로 사천구간 18km 도보를 마무리하며
지방도 1002호선을 따라 진교 방향으로 한참을 걸어서 곤양면 맥사리 끝자락에서 도보를 마무리했다. 시청 홈페이지에는 맥사리 예미골이 종점이라 되어 있지만, 그곳이 정확히 어디쯤인지 지금도 잘 모른다! 불과 십여 년 전, 경상남도와 사천시는 막대한 예산을 들여 ‘이순신백의종군로 조성 사업’으로 응취루를 복원하고 종합안내판과 방향 표지석 등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 결과물들의 현주소는? 역사적 의미를 되살리는 것은 고사하고 낡은 안내판과 표지석이 흉물처럼 곳곳에 방치되어 있었다! 역사 길로도, 도보 길로도 아쉬움이 많이 남는 길이다. 어찌하면 좋을까?
※ 개인적인 지식과 생각에 의존하여 작성된 글이라 일부 내용이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여행일 2022-1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