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 여행자의 시선_걸으며 생각하며 Ep.7
가을, 그 설렘 속으로
이순신 백의종군로(사천구간)1, 삼정마을회관~다솔사입구
글・사진 조영아

가을 우체국 앞에서 그대를 기다리다
노오란 은행잎들이 바람에 날려가고
지나는 사람들 같이 저 멀리 가는 걸 보네
세상에 아름다운 것들이 얼마나 오래 남을까
…
_ 윤도현 ‘가을 우체국 앞에서’
가을 노래와 함께 도보를 시작한다. 첫 곡만 선택하면 그다음부터는 랜덤으로 유사한 분위기의 노래가 이어진다. 문명의 이기가 가져다준 호사를 맘껏 누리는 순간이다. 참 좋은 세상 아닌가!
올봄부터 시작한 사천 도보 길 걷기는 여름을 지나 어느덧 세 번째 계절의 문턱에 다다랐다. 뭘 해도 좋지 않겠냐마는 도보에 가을 만한 계절은 없으리라! 걷는데 계절을 크게 개의치 않는 나지만, 그래도 가을 도보는 맘을 설레게 한다. 그 설렘 속으로 한 발짝 다가가 보자.


이순신 백의종군로, 사천구간 도보를 시작하다
곤명면 삼정마을회관 앞에 주차를 하고, 어렵사리 이순신 백의종군로 표지석을 발견했다. 배(거북선) 모양을 본떠 만든 것 같으나 거창한 모양새에 비해 알려주는 정보는 빈약하다. 여기가 이순신 백의종군로 사천구간의 시점이라면 전체 구간 안내도 정도는 하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여하튼 합천으로 가는 건 아닐 테고 노량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다. 마곡마을에 이를 때까지 제법 긴 걸음 동안 방향에 대한 불안감은 계속되었다. 그 흔한 리본도, 화살표도, 시쳇말로 1도 없으니!
여기서, 이순신 백의종군로를 짧게 설명하자면, ‘이순신이 누명을 쓰고 의금부에 투옥되었다가 1597년 4월 1일 백의종군(흰옷을 입고 군대에 복무한다는 뜻으로, 관직이 없는 신분으로 전쟁터에 나간다는 의미) 처분을 받고 한성(서울)을 출발한 후 경상남도 초계(합천)에 도착하여 도원수 권율의 부하로 백의종군하던 중, 8월 3일 경상남도 진주의 손경례 집에서 삼도 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되기까지 넉 달에 걸친 640.4km의 여정’에 붙인 이름이다. 그 길에는 하동, 산청, 합천, 진주, 사천에 이르는 161.5km의 경상남도 구간이 포함되어 있다.
이 가운데 사천을 통과하는 구간은 18km 정도, 7월 21일부터 23일까지 사흘 동안 곤양을 거점으로 십오리원(지금의 곤명면 봉계리)에서 노량까지 정찰을 위해 다녔던 구간이다.(출처. 뉴스사천 <충무공탄신일에 가본 백의종군로> 2009.04.29. 기사문 및 인터넷 자료 편집)




가을이 물들고 있는 들녘, 농로를 따라 걷다
삼정마을에서 출발하여 은사마을을 향해 걷는다. 지천에 가을이 물들고 있었다. 처음에는 길을 몰라 찻길을 따라 걸었는데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농로로 내려와 걷고 있었다. 가을이 한 발짝 더 내 곁으로 왔다. 어디에선가 짙은 들깨 향이 난다 했더니 바로 길옆에서 들깨꽃이 나를 향해 미소 짓는다. 추석 때 엄마 집 마당에 핀 들깨 꽃송이를 따서 찹쌀 옷을 입혀 튀겨 먹던 들깨보숭이가 생각난다. 얼마나 고소하고 맛있는지는 먹어본 사람들만 아는 비밀이다!


마곡마을 정자에서 최상의 한 상 차림을 즐기다
은사마을을 지나 마곡마을 정자에서 잠시 쉬어가려고 자리를 잡았다. 아침을 먹지 않아서인지 시장기가 살짝 돌았다. 정자 한 켠에서 TV 시청 중인 어르신께 구운 달걀 하나를 건네 드리니 겸연쩍어하시며 받으신다. 동네 정자 이용료입니다, 속으로 말하고는 점심을 먹는다. 김밥 한 줄과 사과 두 쪽, 불어오는 가을 바람과 무르익은 가을 볏논의 풍광, 값을 매길 수 없는 최상의 한 상 차림이다!
이제, 다솔사를 향해 간다. 마곡마을을 벗어나 조금 걷다가 백의종군로 표지석을 발견하면 오른쪽으로 가야 한다. 완사천을 건너는 마곡교을 지나 걷다가 마실길에서 길을 잃었다. 산길을 한참을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왔는데, 내려오면서 보니 누군가 돌 위에 ‘길 없음’ 표시를 해 놓은 게 아닌가! 인생이란 실수를 통해 교훈을 얻는 법, 오늘도 두 발로 걸어서 작은 교훈 하나 줍고 다시 제 길로 돌아온다.


올가을이 가기 전에 코스모스 흐드러지게 핀 곤양천 둑을 다시 걸어보고 싶다
마실길 끝나는 지점에서 원전마을을 만난다. 원전마을은 곤명면 행정소재지다. 다솔사로 가려면 원전교를 지나야 한다. 곤양천 둑위에 붉은 조형물과 함께 김동리길이 보인다. 코스모스를 보니 예전에 곤양천변을 따라 코스모스 꽃길 걷기 행사를 했던 생각이 난다. 행사가 없어진 이유가 하동 북천 코스모스 축제 때문인지, 코로나 팬데믹 때문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아무튼 그때의 행복했던 기억은 지금도 남아있다. 외래종 꽃들이 우리 산천을 뒤덮고 있는 요즘, 코스모스는 어릴 적 순박했던 추억이 어려있는 정겨운 꽃이다. 행사는 굳이 없어도 된다. 올가을이 가기 전에 코스모스 흐드러지게 핀 곤양천 둑을 다시 걸어보고 싶다.
다솔사 입구에서 걸음을 멈춘다. 응취루(곤명면 두모리)를 거쳐 맥사리 예미골까지, 남아있는 절반의 구간은 가을이 더 깊어진 후에 걸으려고 남겨둔다. 오늘, 삼동마을회관에서 다솔사 입구까지 대략 10km 구간에는 표지석 5개 외에 역사적 의미를 설명하는 어떠한 안내판도, 길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는 어떠한 자그마한 표식도 없었다. 더군다나 모든 길이 찻길이었다! 아아, 이렇게 도보 여행자에게 불친절한 도보 길이 있다니!! 남아있는 절반의 구간에서 최소한의 배려를 찾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하정우의 글에 내 마음을 얹는다.
“오늘 우리가 고단함과 귀찮음을 툭툭 털고서 내딛는 한걸음에는
돈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가치가 있다.
나의 오늘을 위로하고 다가올 내일엔 체력이 달리지 않도록 미리 기름치고 돌보는 일.
나에게 걷기는 나 자신을 아끼고 관리하는 최고의 투자이다.”
_ [걷는 사람, 하정우] 중에서
※ 개인적인 지식과 생각에 의존하여 작성된 글이라 일부 내용이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여행일 2022-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