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사진 김도숙
검은 빛 바다 위를 밤배 저어 밤배 무섭지도 않은가 봐 한없이 흘러가네 밤하늘 잔별들이 아롱져 비칠 때면 작은 노를 저어 저어 은하수 건너가네
끝없이 끝없이 자꾸만 가면 어디서 어디서 잠들 텐가 음 볼 사람 찾는 이 없는 조그만 밤배야
– 둘 다섯의 ‘밤배’ 중에서
어느 여름날 밤, 등대로 가는 방파제 위에 빙 둘러 앉아 노래를 안주 삼아 우리는 맥주를 마셨다. 20대 때 친구의 두 살 아래 남동생과 그 친구들이 서울에서 내려오면 자주 어울려 놀곤 했었다. 친구 동생들이라 부담이 없었고, 말도 통했던 것 같아 운흥사 가는 와룡골에도 갔고, 진분계 계곡에도 갔었다. 그리고 무더운 여름날 밤에는 등대로 가서 노래도 부르며, 이런저런 청춘의 고민들을 얘기하곤 했었다. 그 당시 유행했던 ‘밤배’, ‘바위섬’, ‘등대지기’ 노래를 목청껏 부르며, 한여름 밤을 보냈다. 어디로 가야 할 지 방황하던 우리의 젊은 날은 목적지도 모르고 무작정 흘러가던 ‘밤배’만 같았다.
오래 전부터 삼천포 앞바다를 비추던 등대는 삼천포항의 상징이기도 하고, 남녀노소가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였다.
초등학교 5~6학년 여름방학 때쯤이었던 것 같다.
친척 언니(엄밀히 말하면 오촌 이모뻘 되는)가 부산에서 온 이종 사촌과 나를 데리고 밤 마실로 등대에 갔다. 저녁 무렵, 사람들은 시원한 밤바다 바람을 쐬기 위해 등대 주변에 모이곤 했다. 방파제에 앉아 도란도란 얘기 나누는 사람, 낚시하는 사람들로 등대 주변에는 늘 사람들이 있었다.
등대로 이어진 긴 방파제에 서면, 바다 저 편엔 작은 섬들이 띄엄띄엄 어둠 속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고, 한쪽으로는 새벽부터 고기잡이 나섰던 어선들이 지친 몸을 이끌고 돌아와 쉬고 있는 고향의 작은 항구가 보인다.
어둠 속의 밤바다는 늘 신비로웠다.
언니가 물었다. 각자 미래의 꿈이 무엇인지를.
이종 사촌은 맛있는 거 많이 먹어 보는 것이라고 말했던 것 같다.
나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내가 말했던 꿈을.
그 꿈은, 이 작은 항구를 벗어나 저 바다 너머의 세계로 가 보는 것, 세계를 두루 돌아보는 것이라고. 그리고 그 꿈을 가슴에 품고 실현하고 있다.
내 방랑벽은 그때부터 싹 트고 있었다.
문명의 발상지를 찾거나 비밀을 품고 있는 듯한 사막을 보기 위해 낯설거나 익숙한 지명의 세계 각처를 두루 돌아다니며, 그곳의 사람들과 풍광들을 만났다. 인도에서 타지마할의 신비롭고 아름다운 건축물에 감탄하였고, 이집트에서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도 보았다. 터키에서 아르테미스 신전과 이탈리아의 콜로세움, 피사의 사탑, 페루의 마추픽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코르코바도산의 예수 십자상. 칠레의 아따까마 사막 등 불가사의하고 너무도 경이로운 건축물과 풍광들이 내 가슴을 뛰게 하였다. 그래서 내게 주어진 과제를 수행하듯 나는 쉼 없이 떠났다 돌아오기를 되풀이하고 있다.

인류 문명은 어느 것이나 그 기원이 있으며, 문명사적 상상력을 갖고 있었다. 등대의 기원과 상징은 초기 인류가 지폈을 불빛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등대 문명사에서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 등대를 능가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파로스는 신화 그 자체가 됐고, 등대를 뜻하는 ‘파로스’ 에 그 이름을 남겼다고 한다. ‘라이트하우스(lighthouse)’ 는 후대의 영어식 표현일 뿐, 지금도 이베리아반도나 프랑스, 이탈리아 등지에서는 여전히 ’파로스‘가 쓰인다고 한다. 파로스 등대는 지진과 조류로 인해 바다 밑으로 고스란히 가라앉았지만, 120~140미터로 추정되는 높이로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속하게 되었다.
오늘 나는 다시 삼천포항의 등대를 찾았다. 밤바다 바람이 한여름의 무더위를 씻어 주어 가슴속까지 시원하였다. 방파제 아래 갯바위에 와 부딪치는 파도소리는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며 오래 전 기억까지 되살아나게 해 주었다. 조업을 끝내고 귀항하는 어선들이 바삐 항구로 돌아오고, 밤하늘엔 짙푸른 먹구름이 잔뜩 드리워져 신비로움을 더한다. 청널공원의 풍차에도 불이 켜진다. 등대에서 가까이 보이는 삼천포대교의 빨강, 초록, 파랑, 보랏빛 수를 놓은 현란한 불빛이 멋진 야경을 그려 내고 있다. 마침내 삼천포항도 하루의 고단했던 일상을 끝내고 서서히 고요 속에 잠기어 갔다.
등대는 어둠 속에서 빛을 밝혀 뱃길을 이끈다.
내 마음속에도 쉼 없이 불 밝혀 주는 그것. 어떻게 사는 것이 난파하지 않고 바른 길로 가는 것인지를 늘 묻는 한 줄기 빛 같은 등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