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 여행자의 시선_걸으며 생각하며 Ep.5
실안 포도밭에 포도는 영글고
이순신바닷길 4코스, 모충공원~늑도
글・사진 조영아
오늘은, 길동무와 함께 걷다
혼자 걷는 것을 제일 좋아하지만 가끔은 길동무를 허용한다. 오늘 도보길 길동무로 자처한 이는 이 길에서 나고 놀던 소위 이 동네 출신이다. 오랜만에 고향을 마주하려니 설레는지 지난주 큰 딸내미가 사준 등산화를 신고 나 먼저 나갈 채비를 하고 섰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출발은 기분 좋은 두근거림으로 충만하고 거기에, 길동무의 설렘이 보태어진다.

실안 포도밭에 포도는 영글고
오늘은 모충공원에서 출발하여 늑도까지 걷는다. ‘이순신바닷길 4코스’ 또는 ‘실안노을길’이라 불리는 이 길은 8km정도의 비교적 짧은 구간이다. 두세 시간여 걸리지 않을까 싶다.
이른 더위로 한낮 기온이 30도가 훌쩍 넘는다. 한더위를 피해 볼 요량으로 아침 6시쯤 도보를 시작하려 했으나 이러저러한 이유로 7시가 넘어서 모충공원에 도착했다. 마음이 바빠서 공원 산책은 건너뛰고 주차만 하고 얼른 실안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다. 길 오른쪽으로 펼쳐진 실안 포도밭에는 연두빛 포도가 실살스레 영글어 가고 길가에 활짝 핀 무궁화는 옛 친구에게 방긋 인사를 건넨다.


선상카페와 삼천포마리나 아침 풍경에 가만히 젖어 드는데
조금 더 걸으니 포도밭 너머로 실안 앞바다에 덩그러니 떠 있는 선상카페가 보인다. 처음 생겼을 때는 멋진 야경 뷰로 제법 유명했었는데 최근 들어 못지않은 카페들이 실안 해안도로를 따라 하나둘 경쟁적으로 생겨나면서 인기가 이전만 하지는 못한 것 같다.(개인적인 생각이다!) 삼천포마리나에 가지런히 정박해 있는 요트들의 다채로운 반영을 감상하며 멍하니 걷고 있는데, 한참 앞서가던 길동무가 오라는 손짓을 한다. 순간, ‘저리로 가면 길이 없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아무 말없이 그쪽을 향해 걷는다. 이 동네 출신을 믿어볼 요량이다.


길동무 덕에 생각지도 못한 풍경을 마주하다
길동무가 이끄는 데로 해안가를 따라 영복마을로 향한다.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는 해안가 홀로 우뚝 서 있는 화려한 꽃무늬 옷을 입은 이순신장군상을 지나, 언제부터 쌓였는지 알 수 없는 수많은 굴 껍데기를 저려 밟으며 길동무를 놓칠세라 재빠르게 발을 움직였다. 들물(밀물)이 시작되어 바닷물이 연방 발에 닿을 듯 말 듯 한데 길동무의 발걸음은 전혀 망설임이 없다. 많이 해 본 가락이 있어서인지 걸어가는 뒷모습에 자신감이 넘친다. 밀물 때라 가는 길이 끊겨 다시 돌아와야 하면 어쩌나, 바위에 미끄러지면 어쩌나, 온갖 의심과 걱정을 안고 걷는 나와는 완전 딴판이다. 다행히 나의 걱정은 기우였고 찻길로 갔었더라면 전혀 보지 못했을 생각지도 못한 풍경을 마주한 나는, 오래도록 추억할 행복 한 줌을 덤으로 얻었다. 모두 길동무 잘 둔 덕이다!


동네 사람들이 걸어 다니던 길을 이어 놓았으면
해안가를 걸어 영복마을에 도착한 시간은 아침 9시 무렵이었다. 벌써부터 숨이 턱턱 막히고 온몸은 땀으로 샤워를 하고 있었다. 늦은 출발을 잠깐 후회하는 마음도 들었으나 한여름 도보에 익숙한 체질이라 크게 개의치 않았다. 영복마을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차가 다니는 윗길로 다시 올라갔다. 길동무 말로는 영복마을에서 산분령까지 해안가로 가는 길이 영 없지는 않으나 사람들이 다니지 않은 지가 오래되고 풀이 뒤엉켜 있어서 힘들 것 같다고 했다. 도보길을 처음부터 찻길이 아닌 말 그대로 동네 사람들이 걸어 다니던 길을 이어 놓았으면 훨씬 더 좋았을 것을, 그러면 바다를 더 가까이 느끼며 걸을 수 있었을 텐데….
삶은 여전히 의미 있는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있다
아쉬움을 달래며 도착한 곳은 산분령길 소공원이다.(사실 정식 명칭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까마득한 신혼 시절의 추억 한 조각이 남아있는 곳이다. 30년 전 이야기다. 캠퍼스 커플이었던 남편과 6년 연애 끝에 결혼하여 삼천포 벌리 작은 원룸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허니문 베이비를 가지고 배가 조금씩 불러올 때쯤의 내 생일날이었다. 결혼 후 첫 생일이고 아기까지 가진 나를 축하해 주기 위해 남편이 깜짝 이벤트를 준비한 것이다. 저녁 산책을 하자며 이곳(우리는 이곳을 똥통이라 불렀다. 지금은 옮겼지만 그 당시는 근처에 분뇨처리시설이 있어 냄새가 많이 나서 그랬던 것 같다.)으로 나를 데려 왔고, 미리 와 있었던 교회 청년들은 공원 곳곳에 컵에 담긴 자그마한 촛불을 켜 놓았다. 얼떨떨해하는 나를 청년들이 둘러싸고 남편은 옆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던 기타를 치며, 아마도 ‘이 세상에 하나밖에 둘도 없는 내 여인아~~’로 시작하는 나훈아 씨의 ‘사랑’을 불렀던 것 같다. 지금은 손발이 다 오그라들 일이지만 그때는 낭만도, 설렘도 생생히 살아 있었던 청춘이었다! 그 때 기타 치며 노래하던 그 사람이 지금 내 앞에 희긋희긋 흰머리 날리며 서 있다. 그 시절은 그 시절대로, 지금은 지금대로 삶은 여전히 의미 있는 아름다움으로 빛나고 있다. 이 얼마나 멋진가!




추억 삼매경에서 다시 바다 황홀경으로
추억 삼매경에서 돌아와, 다시 바다 황홀경에 빠져든다. 눈앞에 삼천포대교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고 그 위로 사천바다케이블카가 쉼 없이 움직이고 있다. 그리고 대교 아래에는 우주선 모양의 해상펜션이 둥실둥실 떠 있다. 아아, 이토록 아름다운 광경을 어찌 필설로 형용하랴! 그저 넋 놓고 바라만 볼 뿐이다.
삼천포대교 위를 걸어서 오늘의 종착지 늑도를 향한다. 대교 위에서 내려다본 바다 풍경 또한 가관이다. 마치 사천해전을 연상케 하는 문어잡이 배 수십 척이 삼천포 앞바다를 가득 메우고 있다. 며칠 전 돌문어 금어기가 끝났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래서인지 문어잡이 배들이 더 많아진 것 같다. 전에 가끔 문어를 갖다 주던 지인이 있었는데 요즘은 소식이 뜸하다. 문어가 먹고 싶은 건지 지인의 소식이 궁금한 건지, 도보를 마치고 용궁시장을 갈까 말까 머릿속이 갑자기 복잡해진다. 늑도 들목에 있는 이순신바닷길 종합안내판 앞에서 여정을 마무리하고, 용궁시장 대신 문어물회집을 향해 달려간다.
※ 개인적인 지식과 생각에 의존하여 작성된 글이라 일부 내용이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여행일 2022-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