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들의 소풍지 남일대 해수욕장

글 · 사진 김도숙

삼천포에서 태어나고 자라 이곳에서 초, 중, 고를 보낸 이들이라면 봄과 가을 학교 소풍지로는 남일대 해수욕장이 거의 대부분이었으리라. 소풍날이 다가 오면 지겹도록 간 남일대였기에 은근히 다른 곳으로 가지 않을까 내심 기대도 해 보았건만, 번번이 선생님들이 정한 소풍지는 기대를 저버리고 역시 남일대였다.
“또 남일대라고?”
아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불만을 터뜨리곤 했다. 남일대 외에는 다른 소풍지가 없었을까? 그렇게 우리는 학창시절 내내 남일대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도 남일대 모래사장이나 갯바위, 또 코끼리 바위 옆에서 친구들과 사진도 찍으며 우정을 쌓았다.
각자 싸 온 도시락을 친한 아이들과 나눠 먹고 자유시간이 끝나면, 모래사장에서 학년 별, 학급별로 줄지어 모여 앉아 장기자랑을 했었다. 각 반의 대표가 나와 춤과 노래 실력을 뽐내며 함께 박수 치며 환호하던 기억은 좋은 추억으로 떠오른다. 노래를 잘 하거나 특기할 만한 재주가 있는 아이들은 그 때부터 우리의 우상이 되곤 했다.

 

중학교 봄소풍 때 코끼리바위가는 길

세월이 흘러 교사가 되었다. 첫 발령지인 하동 화개에서 삼천포로 돌아 와 다른 곳으로 발령받아 떠날 때까지 오래도록 이곳 학교에서 근무하였다. 그런데 이곳에서 재직할 동안 아이러니하게도 소풍지는 교직원 회의에서 거의 남일대 해수욕장으로 정해지곤 하였다. 많은 아이들을 데리고 특별히 갈 곳이 삼천포에는 딱히 없었던 탓이기도 했다. 그렇게 아이들도 우리 때처럼 남일대를 지겨워했을 지도 모른다.

남일대 해수욕장은 여름날, 어르신들의 치유 공간이기도 하였다. 무리한 노동으로 아픈 팔과 다리를 뜨거운 모래 속에 넣고 모래찜질로 삭신을 돌보았다. 물리치료도 없던 시절, 모래찜질이야말로 유일한 치료제였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그 옆에서 모래성을 쌓았다 부수며 시뻘겋게 살갗이 익도록 뙤약볕 아래에서 한나절을 보내곤 하였다.
한때는 고운 모래로 서부 경남에서 제법 유명세를 탔기에 여름철이면 많은 인파들이 해수욕장을 가득 메웠다. 알록달록한 파라솔 아래에서 일광욕을 즐기거나 바닷물에서 수영을 하던 남녀노소로 북적거렸다.
그러던 남일대에 현대식 호텔이 생기고 해수 사우나 시설이 생겨 모래찜질을 대신하였지만, 그마저 운영난에 문을 닫아 못내 아쉽다.

 

코끼리바위

남일대에 얽힌 또 다른 기억이 있다. 20대였을 때, 이곳에는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청춘의 열기를 한껏 발산할 수 있었던 디스코장도 있었다. ‘산호장’ 건물 옥상으로 저녁이 되면 청춘 남녀들이 삼삼오오 모여 들면, 싸이키 조명이 현란하게 돌아가고 그 당시 유행했던 빠른 댄스곡에 맞춰 마음껏 몸을 흔들어 대곤 하였다. 술과 춤과 젊음의 열기로 분위기는 광란의 도가니가 되기도 하였다.
또, 코끼리 바위로 가는 길목에는 지금도 그렇지만 가게 앞에 포장마차가 있어 조개구이라든지 해산물을 팔던 곳들이 즐비하였다. 해산물 굽는 연기와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여 사람들로 북적거리곤 하였다.
가게 앞에 세워져 있는 커피자판기에서 뽑을 수 있는 믹스 커피는 묘한 맛이 있어 자주 애용하였다. 특히, 비오는 날 바다를 보며 마시는 커피향은 가히 일품이었다.
코끼리 바위로 가는 언덕 위에는 하얀 집이 있었는데, ‘신선장’이라 불렸다. 그 당시 이곳 지역에서 부호로 알려진 집의 별장이었다. 책으로만 읽던 별장을 현실로 볼 수 있었기에 우리는 그 집을 동경하였다. 별장 안은 어떻게 생겼을까 몹시 궁금해 하며……. 세월이 흘러 부호는 세상을 떠나고 가세가 기울어져 그 별장은 게스트하우스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퇴색한 채 남아 있다.

 

현재의 남일대

수평선 뒤에는 어떤 세상이 있을지 무척이나 궁금했기에 드넓은 세상으로 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도 가 보았다. 내가 찾는 세상이 거기에 있을까 싶었다.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비틀대던 청춘의 방랑기를 보내고, 중년이 되어 다시 찾은 남일대는 고요함 그 자체였다. 늘 잔잔한 바다와 아담한 모래사장, 그리고 코끼리바위…….
이제는 안다. 내가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이 좁다란 공간이 얼마나 평화로운 곳인지를. 우리의 학창시절과 청춘의 기억이 남아 있는 남일대는 그렇게 늘 그 자리에서 나를 품어주고 어루만져 주었다. 이곳은 어리석음과 잘못을 끝없이 받아주고 지지해 준 어머니의 품처럼 편안하였다. 세파에 부딪치며 깨어지고 금 간 내 마음이 달려 와 안긴 곳은 언제나 고향 바다였다.

저 아득히 드러누워 출렁이는 수평선 너머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것이, 먼 곳을 떠돌기만 했던 간절한 그 무엇이 바로 지금 이 순간, 여기라는 것을 남일대는 일깨워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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