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요즘 다시 잡초를 뽑는다.

봄이 오면 모든 생명들은 새롭게 시작한다.

심지어 얼었던 계곡과 하천, 강의 물도 흐르고, 불필요하다고 뽑아 버리는 잡초들도 온 힘을 다해 햇살아래 제 자리를 잡는다. ‘부처님 오신 날’ 준비의 하나로, 다니는 절에서 잡초를 뽑고 있다. 많은 일들 중 편안하게 선택한 ‘잡초 뽑기’ 주위의 친구와 동생들은 이런 내가 궁금하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선뜻 호미를 든 내가 조금은 어색하지만, 어색하지 않았다.

 

잔디밭 한 귀퉁이에 앉아 호미를 들었다.

풀과 흙 내음이 나를 깨우고 편안하게 감싸주었다. 갑자기 꿈인 듯 깊은 기억들이 올라왔다.
2년 전, 우연한 기회에 잔디밭의 잡초를 뽑으며 내가 성장할 수 있는 새로운 경험을 했다. ‘요즘 나는 잡초를 뽑는다’ 라는 제목의 글을 다시 찾아 읽었다. 잡초를 뽑으면서 힘에 대한 긍정과 부정을 알고 제대로 힘을 사용 할 수 있게 된 내용의 글이었다. 2년이 지난 지금. 난, 다시 잡초를 뽑는다. 그 때와 지금 연결되는 글의 내용을 보면서 양육자(대부분 부모)의 영향이 얼마나 큰 것인지 다시 확인 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 때와 지금 연결되는 글을 정리해 본다.

머리를 사용하는 일이 지적이고 우아해 보인다는 나의 신념 속에, 엄마보다 많이 배운 아버지가 집안일에 손을 대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겨왔다. 커텐 달기, 못 박기, 꽃밭에 물주는 것조차 엄마의 뒷손을 요하는 상황이라 엄마는 처음부터 아버지 몸 쓰는 것을 막으셨다. 그래서 엄마는 아버지가 해야 할 힘든 일도 엄마 몫이었고 하실 때마다 짜증과 한탄이 묻어 나왔다. “저렇게 힘들면서 왜 하시지?” 엄마에 대한 고마움과 힘듦, 공감보단 오히려 내가 짜증이 나 귀를 막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몸으로 하는 일들은 힘들고 짜증나며 덜 배운 사람이 하는 것이라는 확신으로 다져졌다. 그리고 체력을 위한 운동마저도 힘을 쓰니 짜증나는 일이란 생각으로 잘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운동 잘하는 남자가 멋져 보이는 것이 아니라 무식한 사람이라고 단정 지어 버렸다. 그래서 나 또한 운동과 더 멀어지게 된 원인이 되었다. 어쩌면 힘 못 쓰고 허약한 내 몸이 우아함을 보여 주는 것 같아 안심되고 좋기도 했었다.

 

이런 반복적인 내 삶의 패턴을 들여다보고,

지속적인 내면 작업과 개인 상담을 받고 있었던 2년 전, 잡초를 뽑으며 얻는 성취감과 희열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힘쓰는 엄마를 무식하다고 거부하고, 일 못하는 유식한 아버지와 동일시해왔던 내가 보였다. 이건 무식한 일도, 힘을 써서 무식해지는 것도 아니란 것을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이 되었다. 지금 이러고 있는 나를 그대로 보고 있는 경험도 하고 있었다. 엄마를 무식하다고, 아버지는 닮아 가려고 했던 나에게 비난보단 그럴 수밖에 없었던 나를 토닥여준 것 같다. “그땐 최선 이었다” 고 가슴을 안아주었다. 이런 생각과 느낌은 지금도 비슷하다.
그러나 순간 여기 머물러 있는 나의 힘은 지금이 더 편안하고 중심을 잡고 있다.

 

나는, 요즘 다시 잡초를 뽑는다.

집 청소와 설거지, 적은 반찬을 만들어 즐겁게 밥 먹는 등 몸을 움직이는 일들을 하고 있다. 잘못된 신념을 갖고 있던 내가 몸을 움직이는 일들을 시작하면서,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되고 말없이 세밀하게 쳐다보기도 된다. 호미를 들고 땅을 팔 때 느껴지는 탄력과 부서짐에 집중도 한다. 노력하지 않아도 될 일은 된다는 경험을 가끔씩 하는 순간도 있다. 이런 경험들이 쌓여 내 삶이 조금씩 여여해진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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