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사진 김도숙
누구에게나 추억은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다지 의미를 주지 못하는. 그러나 추억의 주인에게는 늘 애틋하고 자기만의 것이라고 생각되는 그런 추억이, 빛 바래고 먼지 쌓인 기억 속 풍경 사진들의 몇 장면을 들여다 보는 것같은.
오래 된 노트에서 발견한 내 젊은 날의 고통과 시련을 가득 메운 글 속에 그 소년도 있었다.
삼천포 시장과 가까이 있어 장날이거나 마트에 들를 때 찾게 되는 통창공원! 통창공원도 바야흐로 봄이다. 연분홍, 진분홍, 알록달록 연산홍이 활짝 핀 공원은 봄의 활기로 가득하다. 통창공원에 오르면 오래 전 기억 속에 문득 떠오르는 소년이 있다.

30여 년 전쯤이었다. 삼천포J중학교에 근무할 무렵의 일이다. 우리 반 한 아이가 결석을 하였다. 할머니와 여동생과 사는 근호(가명)가 학교에 오지 않은 것이다. 간혹 할머니가 아프다고 조퇴를 하곤 했지만 결석은 한 번도 안 하던 아이였다. 근호의 할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까 걱정이 되어 전화를 해 보았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연락이 안 되어 어쩔 수 없이 다음 날까지 기다려 보기로 하였다.
그 다음 날도 근호는 교실에 보이지 않았다. 수업을 마치고 그 동네 사는 현수(가명)를 앞세우고 가정 방문을 갔다. 지금의 통창공원으로 바뀌기 전, 내 기억으로 이곳은 작은 산동네였다. 꼬불꼬불 가파른 언덕배기에 근호가 살고 있었다. 그곳은 팔포항과 인접해 있어 뱃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가난한 동네였다.
근호네 집은 허름하고 비좁은 집에 몇 가구가 모여 살고 있는 듯하였다. 집안에 놓여 있는 구차한 살림살이가 이 집의 형편을 대신 말해 주었다. 마당 한 귀퉁이엔 근호가 신문배달 할 때 타는 듯한 낡은 자전거가 세워져 있었다.
“근호야, 선생님 오셨다.” 현수가 근호를 부르자 근호가 나를 보고 몹시 쑥스러워하는 모습이었다. 방문을 빼꼼 열고 나오시는 허리가 굽고 주름살 가득한 할머니가 근호 할머니였다. 근호가 학교에 나오지 않아 걱정이 되어 왔다고 말씀 드리니, 할머니는 근호가 아팠다고 하셨다. 그리고 나를 마루에 앉게 하시고 한스럽게 살아 오신 할머니의 기구한 사연을 들려 주셨다.
근호가 세 살 때 근호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근호 어머니는 어린 남매를 키우기 위해 식당에 일을 나갔다고 하였다. 그러나 함께 사는 시집 식구들의 오해와 횡포에 견디다 못해 남매를 두고 집을 나갔다는 말씀을 전하신다. 그래서 근호는 부모의 정을 알지 못하고 쭉 할머니 손에서 키워졌단다. 할머니 혼자 힘으로 두 아이들을 뒷바라지 하다 보니 집안 형편도 말이 아니고, 근호의 영양상태도 안 좋아 속병이 생긴 것 같다고 하셨다. 할머니도 성하신 몸이 아닌데, 근호까지 아프다니 너무 걱정스러웠다.
그동안 근호가 신문배달을 하고 동사무소(지금의 행정복지센터)에서 소년가장으로 학비가 지원되었지만, 두 아이와 할머니가 생계를 꾸려가기엔 늘 힘겨운 삶인 것 같았다. 나는 그 집안에 감돌고 있는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 불운한 운명을 어쩔 도리 없이 살아내야 하는 우리네 삶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았다. 그 당시 나 또한 청춘인 내가 감당하기에는 불가항력적인 운명의 수레바퀴 속에서 힘들게 버티고 있었으므로.
당신의 설움에 복받쳐 우시는 근호 할머니를 어떻게 위로해 드려야 할지, 그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몰라,
“근호야. 내일은 꼭 학교에 나와야 돼”
“할머니, 너무 상심하시지 마세요.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을 찾아볼게요.”
라는 말밖에 없어, 사 가지고 간 음료수 박스를 전하고 그 집을 나왔다.
들어갈 땐 보지 못했는데, 언덕 밑으로 팔포 앞바다가 내 시야에 시원스레 들어왔다. 언제부턴가 늘 이 고장을 해일로부터 지켜 준다는 아담한 목섬과 이곳 사람들의 삶의 수단인 고깃배들이 정박해 있는 해질 무렵의 포구는 너무도 잔잔하고 아름다워 이 세상의 슬픔이나 여읨 따윈 모르는 것 같았다.

그 후, 근호는 전처럼 학교에 빠짐없이 나왔고, 나도 담임으로서 근호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을 찾아 해주었다. 다행히 소년 가장에 대한 장학금도 있어 얼마간이라도 생활에 보탬이 되도록 하였다.
그해, 가을이었다. 삼라만상이 근원으로 되돌아가는 계절에 나는 정신적 스트레스가 겹쳐 몸살을 앓았다. 무엇보다 건강의 소중함과 내가 힘들 때 나에게 힘이 되어 준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래서 나보다 힘든 사람들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퇴근 후에 꼬불꼬불한 언덕길을 올라 근호네 집을 찾았다. 영양 결핍이라는 말이 걸려 고기와 과일을 조금 사고, 봉투를 준비하여 근호 할머니 손에 꼭 쥐어 드렸다. 고마워하시는 할머니의 모습을 뒤로 하고 돌아 나오는 길에서 어둑해져 잘 보이진 않았지만 전에 보았던 그 아름다운 바다는 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등대의 불빛은 어둠 속에서 길 잃지 않도록 밤바다를 비추며, 뱃길을 인도할 것이다.

체육대회가 있던 날, 수업 시간에는 볼 수 없었던 근호의 활발한 모습을 보았다. 몇몇 아이들이 앞에 나와 응원하며 노래 부르던 아이들 속에 근호가 끼어 있음은 정말 뜻밖이었다.
‘저런 모습이 있었구나!’ 늘 힘없고 기죽어 있다고 느꼈던 근호의 모습은 나의 고정관념이었는지도 모른다.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아이들 속에는 근호 못지않게 어려운 환경의 소년들이 있을지 모른다. 다만 내가 잘 알지 못할 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힘겹고 고통스러운 삶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는지 자주 잊어버린다. 자신의 아픔만을 생각하다 보면. 그러나 이제는 남의 아픔을 돌아보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아파 본 사람은 남의 아픔까지 자신의 아픔처럼 느낄 수 있다. 심지어 인간만이 아니라 뭇 생명체에게서도. 그래서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것이리라.

예전의 산동네였던 통창공원은 주민들의 쉼터이며, 산책길로 탈바꿈하였다. 넓은 공터에는 열대수가 이국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여름철엔 쏟아져 내리는 인공 폭포수가 더위를 식혀 주기도 한다. 오르는 길에는 바람개비가 돌고, 갖가지 나무와 꽃들이 사람들을 반기는 도심 속 공원이 되었다.
야트막한 산동네가 아름다운 통창공원으로 바뀐 오랜 시간 뒤, 그 소년은 지금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지, 추억의 시간과 풍경을 그리움 섞어 이 봄날 그려 본다.

* 이 글은 필자가 30여 년 전에 써놓았던 글을 바탕으로 쓴 것이며, 개인 정보 보호차원에서 가명을 쓰게 된 점을 밝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