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오빠와 남동생은 새총을 제법 잘 쏘았지.
어쩌다가 다투어 잔돌을 던져 박이 터진 아이도 있었고 그 아이의 이마에 하얗게 바른 붕대랑 밴드가 떠오르는 지금, 참새도 비새도 비둘기도 새총에 맞으면 신문지 솔잎을 넣고 김밥 말 듯 새를 둘둘 말아 물 있는 도랑 큰 돌 위에 불을 지펴 호로록 태워 구운 새의 다리를 집어 들고 맛있게 먹었던 기억도 남아있지 동생은 멀리 떠난 지 오래 이고 오빠를 본지도 오래 되었지만 그 도랑에서의 기억은 감나무 꽃목걸이와 늘 같이 하는데 도랑의 귀신개구리 배는 아주 예쁜 주홍색이었고 등을 푸르고 검은 빛, 그곳에 개미딸기는 싱거웠지만 포근하게 입안에서 녹곤 했었지 딸기는 오돌토돌 붉었지만 그 안의 살점은 예쁜 분홍빛 물텡이.
우리 집 화장실은 깊어도 너무 깊어 키 큰 울 아버지만큼 했었고, 큰 널빤지로 지은 두 개의 화장실과 4분의 1만큼 자리한 잿간도 있었더랬지 나무로 된 넓은 화장실은 우리가 자랄수록 그들이 부실해져 그 무게를 감당하기가 버거웠던지 금방이라도 나무가 부러질 듯 흔들거리기도 있었지 그것이 오래도록 남아 요즘도 가끔 꿈속에서의 그 불안함이 주된 꿈으로 다가오기도 하지.
내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두 살 더 많은 오빠는 그제야 대학을 갔다.
하얀 정복을 입은 오빠와 일행이 우리 집에 초대 받았던 다음날에는 비가 많이 온 탓에 화장실 곁에 흐르던 도랑에서 흘러들어온 물 탓에 화장실은 퐁당퐁당이 되어 그들이 화장실서 나올 때 마다 우물가에 섰던 우리들은 그들의 표정을 보고 배꼽을 잡기도 했었다. 우리들도 비 온 뒷날에 경험하는 그 퐁당 그 냄새 죽을 맛이었다. 그럴 때면 신문지를 깔고 배변을 한 후 배 띄우듯 밀어 넣어야 하는데 그들은 처음 맞이하는 일들이라 잘 적응 했을 리 없으니…….
절 시리즈에 나오는 그네 타는 스님 배변이야기 쯤으로 남아 있는 우리들의 어린 시절 똥 이야기 이다.
위채는 슬레이트를 진즉에 바꾸었기에 지붕이 내려앉겠다는 생각을 해 본적은 없으나, 아래채는 무거운 기와를 얹은 오래된 지붕에는 이끼는 물론이고 풀이 나서 지붕머리에 꽃을 피우기도 했다. 물론 화장실이 있는 그 아래채이며 그 옆에는 소 마구간 그 앞에 조그만 아궁이가 있었고 사랑방이 있었으며 대문 으로 보고 있는 마루는 널찍하니 좋았다. 건너 철길도 보이고 집 앞 논이 훤히 둘러 보이는 그런.
사랑채 입구는 나무문이 길게 서 있었는데 오래되어 떼 내어졌다.
동네 오빠들이 날씨 좋은 날이면 철길에서 노래 소리가 났다.
기타소리도 나오고 제법 노래를 잘 부르던 동네오빠 이름이 어렴풋하다.
엄하신 할머니 탓에 일찍 문을 걸어 잠근 날이면 내 키의 두 배나 되어 보이는 담장을 타고 사랑채로 넘어 들기도 했다.
사랑채 담장에는 사람이 올라가 다리 끄떡이며 놀아도 될 정도의 넓이였다.
그 곳 중앙에는 비단까리라고 부르던 깨어진 유리 조작들을 촘촘히 꽂아두어 혹시 모를 낯 선 이의 담치기를 경계하고 있었다.
비가 온 뒷면 담장에는 이끼가 피어나 갈색의 더듬이는 마치 담장이 숨을 쉬는 거대한 곤충같이 느껴지곤 했다.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의 무게에 담장이 견디기 버거울 것이란 마음 들기도 전에 허물어져버린 추억처럼 길 앞 시멘트가 뿌려지고 담장도 그들이 튀어 올라 옛 맛이 사라져버렸고 스물여섯 이후론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다.
물론 그 이전에 마당은 이미 시멘트가 골고루 발라져 비가 오면 흙이 튀어 촘촘한 집주석물을 구경하기 어려웠다 다만 아래채를 싹 밀어 방 세 칸을 넣어 다세대로 자리 잡았고 안채에서 보면 등을 보듯 이끼긴 마당에 슬레이트 지붕물방울 자국만 남아 있었다. 세 개의 방은 10만원씩으로 월세를 받기 시작했다.
그 후로 난 멀리 경기도로 결혼을 해서 떠났고 여름휴가 추석 설 명절이 되어야 친정에 들리곤 했었다.
어느 여름휴가로 다니러 왔을 때 할머니는 발등이 까맣게 되어 고무신 자국으로 껍질이 벗겨지고 있었다. 놀라 물었더니, 내가 다니러온다는 소식을 접하시고 좁고 가파른 계단을 통해 동네 어귀가 훤히 보이는 옥상에서 온 종일 바라기를 하시었다고……그땐 대진고속도로가 아직 개통되지 않았기에 서둘러 내려와도 거의 7~8시간이 걸리던 시절이었다. 그 때를 떠올리면 당신의 따가움은 아랑곳 하지 않으시고 틀니를 예쁘게 드러내시어 하얗게 웃으며 나를 반기고 계신다. 더듬더듬 그리운 이와 함께하는 추억이 가득 내 고향집에 그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