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사진 김도숙
외갓집을 떠올리면 내 마음 속에는 늙지 않는 어린 소녀가 살고 있다.
그 당시에는 집집마다 아이들이 줄줄이 있어 막내였던 나는 외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머리가 하얗게 세어서 흰 할매로 불렸던 외증조모와 외갓집 아래채에서 살았다. 우리 어머니 일손과 먹을 것이 귀하던 시절이라 음식을 덜어 주기 위한 외증조모의 마음에서였던 것 같다.
외할머니는 남새밭에서 직접 키운 푸성귀들을 서부시장에서 파셨는데, 외증조모는 나를 데리고 시장으로 자주 가셨다. 시장에서 맛있는 사탕이나 과자도 사주시고, 그 당시 ‘삼명당 약방’ 앞에는 목마에 태워 동자 옷을 입혀 사진을 찍어 주던 사진사가 있었다. 간혹 부모들이 남자 아이들을 목마에 태워 사진을 찍었던 탓에 동자 옷만 있었는데, 외증조모는 나에게 동자 옷을 입혀 목마에 태우고 사진을 찍어 주셨다. 앨범 속에 남아 있는 빛바랜 사진이 그것을 말해 준다.
외가에는 젊은 이모들이 부산에서 자주 오곤 했는데. 이모들은 이종 조카까지 외할머니가 거두어야 하는 것이 못마땅했던 것 같아 어린 마음에도 이모들의 눈치가 느껴지곤 했었다. 그때는 어머니보다 나를 끔찍이 사랑해주시던 흰 할매가 더 좋았다. 흰 할매가 가끔씩 죽음 이야기를 하면 나는 “할머니 죽지 마”라고 말하며, 연방 할머니가 돌아가실 것 같아 서럽게 울었던 기억이 난다.
외갓집은 서동 당산나무 아래 큰길가에 있었다. 삼천포서부시장과 인접해 있는 우리 집에서 가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다. 영미사진관(지금의 문화가스)에서 ‘용식이방앗간’ 쪽으로 곧장 올라가는 큰길과 사진관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큰골목창으로 가는 지름길이 있었다.
빠른 길을 선택하면 큰골목창을 만나게 되는데, 그곳에는 예전에 여자가 나무에 목을 매 죽었다는 소문이 있어 늘 이 골목길을 지날 때면 원혼이라도 나타날 듯 으스스한 기분이 들곤 하였다. 큰골목창을 다 오르면 ‘대복’이라는 상호를 가진 수산물 가공공장 건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문을 닫아 흉흉하고 음습한 폐건물이 되어 있다.
대복 위 사거리가 ‘해태거리‘이다. 왜 ’해태거리‘란 이름이 붙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해태거리에서 좌측으로 가면 대방으로 가는 길이고, 똑바로 올라가면 엿 만들던 집이 있었고, 그 위로 좀 더 올라가면 ‘제7일 안식교회’가 있었다. 새벽이나 저녁에 교회에서 울리던 종소리는 외갓집까지 들리곤 하였다.


외갓집 본채는 기와지붕으로 되어 있었는데, 큰 방에 딸린 부엌과 아주 작은 방에 군불을 떼기 위한 아궁이가 있었다. 그리고 초가지붕으로 된 아래채와 그 옆에 곳간과 재래식 변소가 있었다. 청 마루 아래에는 섬돌이 있었고, 봉숭아, 샐비어, 채송화, 맨드라미. 해바라기 같은 꽃들과 석류나무가 심어져 있는 작은 뜰과 장독대가 있는 마당 그리고 펌프로 지하수를 끌어 올렸던 공간이 있었다.
마당에는 평상이 놓여 있었다. 여름날 외사촌들이 방학이라 타지에서 오면 평상에 모여 옥수수도 삶아 먹고, 수박도 쪼개 먹으며 놀았다. 모기를 쫓기 위해 모깃불을 피워 놓고 누워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까만 밤하늘에 총총히 떠 있는 별들만큼 꿈도 많았고 빛났다. 나는 환상의 나래를 펴고 밤하늘을 날아다니곤 하였다.
비가 오는 날이면 양동이나 마당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는 것도 참 좋았다. 흙먼지를 씻어 내리던 빗줄기는 어린 시절을 빚어내던 질그릇 빗살무늬 같았다.
어른들이 모두 출타를 하고 방안에서 우리는 잠이 들었다. 어른들이 돌아와 문을 열라고 양철 대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아 담장을 넘어 문을 땄다는 이야기는 불면증이 심한 지금의 나에게는 참으로 꿈같은 이야기로 들린다.

외갓집에서 올라 가 오른쪽 첫 번째 골목길에는 그 마을을 수호하는 오래 된 당산나무가 서 있다. 수령이 몇 백 년은 족히 될 듯한 나무 둘레에는 금줄이 감겨 있고, 석상 위에는 막걸리도 놓여 있다. 동네 어르신들이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정담을 나누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뱃사람들이 많이 살았던 서동에는 먼 바다로 고기잡이를 나가면 풍어와 안전을 기원했던 마을 사람들의 염원이 이 당산나무에 담겨 있었으리라.
또, 당산거리에서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야트막한 산으로 들어갈 수 있다. 크고 작은 남새밭이 있어 철에 따라 심어 둔 농작물들을 볼 수 있었다.
여고 시절이었나 보다. 어느 휴일, 산책 겸 나간 산길에서 이른 아침의 상쾌한 공기를 깨뜨리는 이상한 사람과 마주쳤다. 그 남자는 나를 보더니 바지춤을 내리고 아랫도리를 가리키며 나에게 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만 혼비백산하여 외가를 향해 미친 듯 뛰었다. 얼마나 뛰었던지 외갓집에 다다랐을 때는 심장이 두 방망이 치고, 다리에 힘이 풀려 그만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외갓집은 정겹고 푸근한 온기가 있었지만, 나무로 된 뒷간에 갈 때만은 달랐다. 밑이 환히 내려다보이는 변소는 나무로 얼기설기 엮어 놓은 발 디딤판이 너무 넓어 자칫 잘못 디뎠다가는 낭패를 볼 수도 있었기에 늘 조마조마했다. 외할머니 혼자 사시는 곳이라 신식 화장실로 바꾸지 않고 외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그렇게 사용되었다.
외할머니는 세 아들을 어릴 때 잃어버리고, 딸만 여섯을 두셨다. 큰딸인 우리 어머니는 외할머니에게 참 잘 하셨다. 철철이 나는 과일이며, 싱싱한 생선들을 아침 시장에서 사서 외할머니에게 올렸다. 그러나 외할머니는 아들이 없어 제사를 모실 사람이 없다는 현실 때문에 조상들에게 늘 죄책감을 가지셨다.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으로 오촌 외당숙은 돌아가시고 인근에 살던 오촌 외숙모에게 집을 물려주라고 하셨다. 제사를 지내주는 조건으로.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외갓집은 사라져버렸다, 타일 벽으로 마감된 현대식 건물로 바뀌어져 예전의 외가 모습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내게 오촌 외숙모도 다리가 아파 언제부터인가 제사를 더 이상 지내지 않게 되었다.
가끔씩 외갓집 동네를 찾을 때면 사라져 버린 외갓집이지만 내 마음속 기억들을 더듬으며 어린 시절로 돌아가곤 한다.
이 세상에 오래 남아 있는 건 무엇일까?
외갓집! 하면 떠오르는 푸른 이파리 같은 싱그러운 색채와 아지랑이 같은 몽롱한 기억만이 햇살 아래 비눗방울 되어 아롱아롱 피어오른다.
그리고 우리의 한 생애는 주마등처럼 빨리 돌아가며 보이지 않는 뒤편으로 사라져 버린다. 마치 한여름 밤의 짧은 꿈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