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 배가 방긋 웃는다고나 할까?

아이들은 그렇게 방긋한 배로 인하여 셔츠가 들려지고 눈망울은 까맣고 둥글던 기억이 잡혀 든 곳은 우리 동네 오백 년 된 포구나무

산에 수박을 키우던 그 시절 여름,

동네 아이들의 수박서리를 위한 최적의 장소였던 그곳에 햇볕에 그을려 까맣고 똘망 똘망하게 깎은 짧은 머리 매무시로 포구나무를 장난감 놀이하듯 위아래로 타고 다니던 아이들 모습도 떠오른다. 광 가득 그리 크지 않은 산수박이 가지런히 줄 서듯 차 있기도 했다. 귀한 수박을 재배하는 동안에 우리 집 아이들은 약간의 으쓱 함으로 산과 포구나무와 집 사이를 오갔던 것 같다.

늘 새로운 그 무엇들의 시도는 연속성은 있으되 끈기와는 별개였던 것 같은 아버지의 사업들……..

지금도 현존하는 그 포구나무는 가을이면 주황빛 열매를 대롱대롱 매달고 나무를 타고 오르던 아이들에게 적당한 간식도 되어주었다. 꽉 깨물었을 때 텁텁한 맛도 났었고 또 고소하게 주황빛 열매답게 맛났던 기억도 머문다.

아이들은 시간이 나면 동네 뒷산에 갈고리를 가지고 나무를 다니기도 했었다. 소나무 갈비(마른 솔잎)를 많이 해 나른 것으로 기억한다.

동네 아이들이 하니 나도 해 보고 싶어 어른들을 졸라도 나무하러 다니는 것은 안 된다고 하셨다. 집 뒤로 각산 그 아래쪽은 지금도 우리 산으로 남아 있는데 그곳에서 어른들이 나무를 해 오시곤 하였다.

집 뒤에는 두 개 정도의 묏등이 있었다. 아이들은 그곳이 놀이터였다. 묘의 상석에서 소꿉놀이를 하기도 하였고. 경사가 있는 그 외의 언덕에서 비료 부대를 타기도 했었다

봄이면 삐삐(어쩌다가 제때를 놓치게 되면 어린 억새라고 기억된다)를 뽑아서 달달하게 씹고 다녔으며, 찔레 봄 순을 꺾어 벗겨 먹기도 했다.

봄날의 밀 서리는 초록 밀을 꺾어다가 불에 그슬려 손으로 비벼 후후 불어 낸 뒤 알맹이를 먹고 나면 잎 언저리는 까맣게 되어 지기도 했다.

가을에는 고구마를 캔 넝쿨을 언덕 여기저기 널어놓아 겨울 소먹이로 썼던 기억도 난다. 그곳에 달려 있던 물기 말라가던 고구마 이삭을 따서 이빨로 껍질 벗겨 먹을 때의 달콤함이 그립기도 하다. 고구마를 캐낸 이후의 가을밭은 거의 작물을 심지 않았던 것 같다. 그곳에서는 까마중과 땡깔이라는 달콤한 먹거리는 눈이 번쩍 뜨이는, 횡재 같이 반기며 즐거워했다. 특히 땡깔은, 아닌 척 시든듯하면서도 탱글한 그 알맹이는 요즘도 빈 밭에 지날 때면 온 밭을 스캔하며 찾고 있는 나를 보곤 한다.

가을이면 슬레이트 지붕 위도 기와지붕 위도, 초가지붕 위에도 노랗게 익어드는 언덕의 잔디 위에도 어김없이 고구마 빼떼기가 널려있었다. 가을비가 내리면 비설거지하느라 온 동네가 분주했다. 아이들 이름과 지붕에서 고구마 빼떼기 내리는 소리로~

이 모든 가을걷이가 끝날 무렵이면 뒷동산 묏등 주변은 노랗게 바래어들었다. 아이들은 웃으며 “옛날에 금잔디 오늘의 똥갈비~” 나무해보는 것을 소원하던 나는 갈고리와 비료부대를 들고 언덕을 올라 북북 긁어 한가득 꾹꾹 눌러 담은 마른 잔디(똥갈비)와 함박웃음 가득 귀에 걸고 집을 들어서며 “저도 나무했어요”

저녁밥을 지을 때면 난 꼭 부엌의 불 담당이어서 으스대며 비료부대를 뒤집어 갈비를 아궁이로 집어넣었다. 화락~~그리고는 끝이었다. 얼마나 허무하던지……. 그 후로 다시는 똥 갈비를 긁지 않았다.

말 나온 김에 또 하나 더듬어 보자면. 불 담당의 매력은 먹거리가 늘 있다는 것인데, 보릿대를 뗄 적엔 불에 익은 보리를 골라 먹는 재미가 있었고, 콩대를 지필 때는 콩의 고소함에 감동하고 이도 저도 없을 때는 고구마를 곁에 묻고 다독다독 소나무 갈비에 익혀 먹기도 했다.

이런저런 소소한 먹거리는 지금 아이들에게 얘길 하면 ‘뭐 그런 걸 다~’라고 한다. 그러나 그때는 먹는 일이 최우선이었기 어린 나에게는 더없이 좋았던 날들이었다.

철없던 날 보리누름에 이런 얘길 들었었다. ‘’아이들은 배가 터져 죽고, 어른들은 배가 고파서 죽고…….‘ 어떻든 빵빵한 배가 방긋하고 웃던 대여섯 예닐곱의 나를 돌아보며 미소 짓는다. 참으로 감사한 시간들이 잘 지내왔다고 다독다독 모두에게 고마움을 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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