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기왓장 귀퉁이를 돌절구로 콩콩콩 가루를 내고 쑥을 뜯어다 반찬을 만든다. 떨어진 꽃잎으로 멋진 진수성찬을 만들고 납작한 돌을 쌓아서 케이크를 만든다. 화분 위에 올려져 있던 안쪽이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전복 껍데기는 접시가 되고, 나뭇가지로 젓가락을 만들면 손님 초대 식탁이 완성이다. 엄마의 화장대에서 가져온 화장품 냄새가 은은하게 밴 가제 손수건은 곱게 개켜져서 한쪽에 놓여 있다.
이곳은 현원이 부모님께서 운영하시는 동금 슈퍼가 있는 동금장 여관 옥상으로 우리들의 즐거운 놀이터가 있는 곳이다. 현원이와 현원 여동생 남동생, 그리고 나와 내 여동생이 자주 소꿉놀이를 하는 장소이다. 슈퍼에서 나온 상자를 겹겹이 쌓아 올린 소꿉놀이집은 튼튼한 성곽과도 같이 믿음직하다. 2층에는 동금 다방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나오는 향기로운 커피 냄새가 시시때때로 올라와 소꿉놀이의 환각 속으로 몰입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친구 현원이는 아래로 동생들이 줄줄이 있는 슈퍼집 맏딸이었는데 가끔 진짜 과자를 공수해 와서 소꿉놀이의 기대치를 한껏 올려주기도 했다. 그리고 때때로 4대 독자라는 현원이 막내 남동생을 끔찍하게 여기시는 할머니가 옥상으로 쫓아 올라오시면 우리는 후다닥 옥상 정수조 뒤쪽으로 숨기에 바빴다. 그 할머니께서는 손녀들은 안중에도 없었고 몸이 허약한 손주가 다칠세라 늘 무슨 한약인가를 지어오셨는데, 한 번은 그게 빨간 개구리를 달인 거라는 소리를 듣고는 나는 기겁을 하며 현원이 할머니에게 마녀 할멈이라는 타이틀을 씌우고 말았다. 어릴 때 나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김일성과 마녀 할멈이었다.
아무튼 어릴 적 나는 동화책 보는 것과 소꿉놀이가 본업이었고, 종이 인형 만들기를 무척 좋아해서 중학교 1학년 때까지 가지고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엄마 부엌에서 뭔가를 만들려다가 프라이팬을 태워 먹거나 부엌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서 혼난 이후로는 소꿉놀이의 꿈이 깨어져 버렸다. 현실은 소꿉놀이가 아니었다. 영어 단어를 외워야 했고 숙제는 산더미 같았다. 백설 공주의 빨간 사과는 더는 치명적이지 않았고, 인어공주의 물거품은 어린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남았다.
세월이 흘러 나는 어른이 되었고 다시 소꿉놀이에 빠져들었다. 달걀을 폭신하게 거품 내어 진짜 케이크를 만들 수 있게 되었고, 밀가루를 발효시켜 커다란 빵을 만들기도 하고, 헨젤과 그레텔의 과자집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만들 수가 있게 되었다. 누군가는 빵집을 해봐라 카페를 차려보면 어떻겠느냐 조언을 보태지만, 나는 어릴 적 그 흥미로웠고 온통 내 마음을 빼앗겼던 그 신성한 놀이(?)를 감히 밥그릇 전쟁과도 같은 시궁창 속으로 밀어 넣고 싶지는 않다. 그냥 소꿉놀이하듯 빵을 굽고 요리를 하는 것이 즐겁다. 어릴 적 동화 속에서나 나오던 것들을 현실 속에서 재현해 내는 것이 가끔 재미있기도 하지만 그때의 간절했던 소망만큼이나 신비롭게 느껴지지는 않는 것이 조금 아쉬울 뿐이다.
오늘도 나는 소꿉놀이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