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해전의 흔적을 찾아 가 본 봄날의 모충공원

글 ‧ 사진 김도숙

 

바야흐로 4월은 온통 꽃밭이다. 연분홍 벚꽃이 가로수에서부터 산 위까지 점령하여 온누리를 환하게 비추고 있다. 참으로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시절이다. 벚꽃 명소들이 많이 있지만 사천에서는 실안 벚꽃길도 아름다움을 한몫한다. 바다가 보이는 길 따라 이루어진 벚꽃 터널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꽃비가 내린 실안 벚꽃길을 따라 노을 카페 거리를 지나다 만나는 곳, 학창시절 드물게 소풍지로 가 보았던 송포동 ‘모충공원(慕忠公園)’을 이 봄날 불현듯 가 보고 싶었다. 그곳은 이순신 장군의 사천해전 승전을 기리기 위해 1950년대에 세워진 이순신 장군 공적비가 있는 곳이다. 그래서 모충공원이 되었다. 원래 이름은 ‘거북등’이라고 불렸다.

 

지금 모충공원은 한창 공사 중이다. 요즘 시니어들에게 열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파크 골프장 조성으로 오래된 나무는 베어지고, 땅도 파헤쳐져 뒤죽박죽 되어 있었다. 파크 골프장 조성 때문에 유서 깊은 나무들이 베어지고 공원의 모습을 변형시키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개발인지 씁쓰레한 마음이 들었다.

공사 차량들만 드나들 뿐 승용차는 진입할 수가 없었다. 공원 아래에 잠시 차를 세우고 걸어서 산등성이를 올라 가 보았다. 이순신 장군의 동상과 공적비가 벚꽃과 어우러져 고즈넉한 정취를 불러 일으켰다. 산등성이에서 송포 앞바다와 이순신 장군이 머물고 갔던 모자랑포가 소나무 사이로 언뜻언뜻 보였다. 이곳엔 소나무가 많아 솔방울도 제법 떨어져 있었다, 이순신 장군의 넋이 서린 모충공원과 늘 푸른 소나무는 연관이 많은 나무인 것 같았다.

 

여수의 전라좌수영에서 군사훈련에 여념이 없던 이순신 장군은 일본군이 조선반도를 침략하여 임진왜란을 일으키자 사천 선창에서 왜군을 맞아 적선 13척을 쳐부수어 사천해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니, 1592년 5월 29일(양력 7월 8일)의 일이었다.

사천해전은 이순신의 두 번째 출전으로 네 번째 전투였다. 전투에는 이순신이 이끄는 전라좌수영 정예 함선 23척과 원군이 이끄는 경상우수영함대 3척 등 총 26척이 참여하였다. 거북선이 이때 처음으로 투입되었다.

이순신 함대는 서해안으로 진출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던 일본 수군이 사천만에 진을 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음력 5월 29일 노량에서 경상우수영 수군과 합류하여 사천만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이 때 해안선을 따라 사천만으로 달아나는 왜군 척후선 1척을 격침시킨 뒤, 계속 나아가 사천포구에 이르렀다. 선창에는 왜군 대선 12척이 메어 있고, 선창 뒷산에는 왜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이순신 함대가 접근하자 왜군은 완강히 저항하며 맞섰다. 마침 썰물 때라 작전상 후퇴로 적선을 바다 한가운데로 유인하였다. 왜선이 따라오자 이순신 함대는 갑자기 뱃머리를 돌려 왜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최전방 돌격선의 임무는 거북선이 맡았다. 거북선은 천지현황(天地玄黃), 사자총통(四字銃筒)과 각종 화포를 집중 발사하였다.

거북선에 이어 판옥선도 일제히 불을 뿜었다. 왜군 함대는 지리멸렬하여 사천 포구 쪽으로 도주하였고, 그러는 사이에 만조가 되었다. 왜군은 배를 버리고 산 위로 도주하였다. 이 전투에서 적선 13척이 부서지거나 불타고 왜군 2,600여 명이 사살되었다.

이 해전에서 이순신 장군은 왼쪽 어깨를 관통하는 총상을 입은 후 이곳 모자랑포에서 밤을 지냈다. 모자랑포는 각산의 한 줄기가 돌출하여 강지바다로 이어 내린 곳으로 산등성이인 거북등에서 300여 미터 떨어져 있다. 거북등 서북간 바로 밑이 장자곡이라는 곳으로 강지바다를 한 눈에 관망할 수 있는 초소 역할을 하였다.

거북등은 이와 같이 사천해전과 연고 깊은 곳이다. – 「모충공원 이순신 장군 공적기념」 글

 

공사 중이라 공원을 한 바퀴 둘러 보지 못하고, 사천해전 역사의 그 날을 상상할 수 있는 안내 글을 읽었다. 임진왜란 당시 상황 속에서 고군분투했을 신하와 백성들의 삶을 생각해 보니, 지금 이렇게 평화로운 시대에 살고 있음이 감사할 따름이다. 인적 없는 공원에 갑자기 나타난 사람으로 인해 놀란 새 한 마리가 푸드득 소리를 내며 날아간다. 공원에서 내려다보이는 모자랑포를 가 보기 위해 길을 나섰다.

모자랑포는 거북등에서 바라보이는 갯가라 지금의 대포에서 노룡, 미룡포구쯤에 해당된다. 송포를 지나 미룡포구로 갔다. ‘거북선길’이라 적힌 작은 푯말이 하나 서 있었다. 어구를 다듬고 있던 초로의 남자를 만나 이곳이 그 옛날 ‘모자랑포’가 맞는지 물어보니 맞다고 한다. 예전에는 바닷물이 오염되지 않아 몰(모자반, 모재기)이 많이 자라는 갯가라 하여 ‘모자랑개’라 불렸지만, 지금은 오염되어 몰은 없고 파래만 잔뜩 낀 바다로 변해 있었다.

물이 귀하던 시절 이 마을에 우물이 있어 임진왜란 당시 그 물로 군사들의 식수로 이용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우물터도 찾기가 어려웠다.

 

모자랑포에서 다시 길을 따라 대포를 거쳐 용현으로 접어 들었다. 거북선 최초 격전지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사천만은 밀물과 썰물을 되풀이하며 오늘을 살아가고 있었다. 역사는 흥망과 성쇠를 되풀이하며 흘러가는데, 선조들의 노고로 지금을 풍요롭게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 생각해 보았다.

 

Previous article
Next article

다른 글 읽기

최근글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