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남혜경
바닷물에 반짝이며 부서지는 햇살 사이로 고깃배와 죽방의 묵은 나무가 줄지어 서 있고 산수화처럼 가까이, 멀리 떠 있는 섬과 섬…
이른 아침 그 풍경 속을 걸어서 시장에 들어서면 할매들이 제각기 떼온 생선과 소채, 과일을 대야에 담아놓고 호객을 한다. 대도시의 마트에 익숙해진 눈에는 터무니없이 싸고 싱싱한 먹거리를 사는 재미 말고도 남도의 정겨운 본토 말을 구사하는 할매랑 입씨름하는 맛이 있다.
할매들이 많이 하는 말은 두 가지다.
– 떠리미(떨이)다. 3천 원만 내고 다 가가라~
– 오늘이라서 나온 기다. 내일은 이거 안 나온다.
게으른 시간에 나가는 만큼 떠리미도 있지만, 팔고 나면 뒤편서 또 한거석(한가득) 내놓는 귀여운 사기도 있다.
처음엔 많은 듯해도 ‘그라모 다주이소’ 하고 주는 대로 받아오다가 다 못 먹어 냉장고에서 뒹구는 게 심란하고 일단 무거워서 들고 올 수가 없다. 끌차까지 샀지만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흥정하기로 했다. 값을 깎는 거 아니고 조금만 사는 거.
– 아침에 낭구서 따온 기다. 이거 한 봉다리 남았다. 만 원에 가 가라.
– 너무 많아예 할매. 혼자 살아예. 무거바서 들고 가도 몬합니다. 반만 주이소.
– 두고 무모 되지. 이거를 우찌 짤라 폴끼고.

할매들 셈은 덤에 익숙해서인지 요상하다. 열 개 만원이면 오천 원어치로 다섯 개나 네 개만 줘도 될 것을, 오히려 여섯 개 일곱 개를 준다. 그러니 남는 건 못 판다는 거다.
단골이 생기니 흥정 성공률이 높아져서 반만 사게 돼도 자꾸만 담는다.
– 됐십니다. 고만 주이소. 다 못 묵어예
– 넘들은 더 돌라카는데 니는 와 주는 것도 싫다카노.
오늘도 예상보다 두 배나 사게 되어 가득 끌고 오는데 들어감 참인지 주섬주섬 챙기던 할매한테 또 붙들렸다.
– 인자 들어 갈란다. 상추 천원에 다가가라. 쑥갓도 좀 주께.
여린 상치 이파리가 한거석이다.
– 아이고 이거를 운제 다묵어예. 천원 드릴께 반만 주이소.
– 설설 무모 금방이다.
굳이 봉다리에 다 담는다.
– 일찍 드가시네예. 좀 팔아십니까?
– 어 쫌 폴았다. 허리 아파서 갈란다.
할배들은 다 머하고 할매들만 이리 열심히 사는지 원.
매달 천 리 길을 오가는 건 아무래도 새벽 판장의 이 풍경 속으로 들어오고 싶어서였나보다.

나의 실향은 말을 조금씩 잃는 것이었다.
서울 여대생이 되려고 입시를 몇 달 앞두고 유명 학원에 등록했는데 버스 안내양의 말을 알아듣는 게 첫 과제였다. 서울 지리에 어두워 ‘시청 앞’이라 외칠 때 좌석에서 일어나 다음 정류장에 딱 내려야 하루가 무사하건만 그 ‘시청 앞’을 듣기까지 몇몇 정류장 이름을 귀에 익혀야 했다. 콩나물시루 같은 만원 버스에서 혹시라도 지나칠까 봐 안쪽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입구 가까운 데서 안내양 외치는 소리에 쫑긋 귀를 세우다 겨우 종로 학원가에 내려서면 그때부터 피로가 밀려와 그 학원에서 뭘 듣고 배웠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물론 까마득한 옛날얘기다. 서울 진학이 지금으로 치면 해외 유학쯤 되는 시절의 이야기. 고향에서 서울말 쓰는 학생은 아버지 사업이 망해서 친척이 있는 우리 동네로 내려왔다며, 지하에 와인창고가 있고 테라스가 딸린 이층 서울집을 그리워하던 여자애(엄청난 거짓말쟁이였다)가 유일했다. 전국이 하루 생활권이 된 지금은 학생은 물론이고 삼사십 대도 억양만 있을 뿐 거의 표준말을 쓴다.
서울말은 인색했다.
문장을 끝마쳐도 감정과 메시지를 다 전달할 수가 없었다. 나는 늘 혀끝에 풍성한 사투리를 숨기고 건조한 건더기만 뱉는 법을 익혀갔다. 잘 버려지지 않는 경상도 갯가의 억양에 어미만 교과서의 표준말을 따르는 애매한 말투를 쓰던 나는 직장을 다니면서 효율적인 소통을 위한 업무용 말투를 갖게 되었다.
간결하고 겸손한 문어체라고나 할까.
부정을 나타낼 때의 중부 표준말은 ‘아니에요’나 ‘그렇지 않아요’로 말을 시작하지만, 나는 문어체로 정체성을 살짝 숨기며 문장을 끝내버렸다.
“그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상대는 내가 차분하고 말을 아끼는 편이라고 여기겠지만 실제 나는 성격이 급하고 말하기를 즐기는 사람이다. 지금도 그때 익힌 표준말을 비즈니스용으로 쓰곤 하는데 뭔가 있어 보인다는 평을 듣는다. 있어 보이기는 뭐, 그냥 어중개비일 뿐이다.
고향 말은 짧아도 그 의미와 메시지가 풍성하다.
동사나 형용사 한 단어로 억양과 장단을 달리해 상대에 맞게 존대와 낮춤을 다 드러낼 수 있다. 주어와 꾸밈말은 잘 쓰지 않는다.
예를 들어 헤어질 때 하는 잘 가라는 인사는 표준말로는 ”안녕히 가세요“ ”잘 가라“ ”조심해서 가거라“ 등이겠지만 고향 말은 ”가라“는 어휘 하나로 다 해버린다.
“가아라~” – 반가웠고 조심해서 가라, 는 동생이나 아랫사람에게 하는 예사 낮춤말.
“가자~~”- 잘 가라, 너도 잘 가고 나도 잘 가겠고 다음에 또 보자는 동년배의 인사.
”가이소오“혹은 ”가입시다~“ – 잘 가시고 또 만나요, 라는 예사 높임말. 주로 가게나 시장에서 물건 사고 나가는 고객에게 하는 정중한 인사.
”가시이소오“- 아주 높임말, 어른이나 선생님에게 하는 예의 바른 존칭.
이런 말을 잘못 사용하고 잘못 알아들으면 버르장머리가 없는 놈이 되거나 지를 무시했다고 기분이 나빠진다.
낯선 시골길에서 길인 듯 아닌 듯 헷갈릴 때 밭에서 일하고 있는 할머니에게 물었다면 풀 뽑느라 고개도 들지 않고 던지는 말투의 억양과 장단을 잘 새겨들어야 한다.
”이리 쭉 가면 길이 있습니까?“
당신이 이렇게 물었을 때 친절하고 그날 컨디션도 좋은 할머니라면 이런 대답을 할 것이다.
”하, 쭉 가아라~“- 응 쭉 가면 길이 있다. 잘 찾아보고 조심해서 가거라.
”거는 엄따아~“ – 그리 가면 길이 막혀서 고생한다. 도로 나가서 가거라.
불운하게도 성질도 고약하고 그날따라 뭔가 기분이 나빴던 할머니라면
”있다!“- 왜 길이 없겠나. 거기 길이 없으면 우리는 어떻게 다니겠냐 이 멍청아.
”엄따!“- 딱 보면 길이 아닌 거 모르겠냐. 니 눈깔이는 뭐하러 달고 다니냐.
핵심 단어의 성조와 어미의 장단으로 정보와 기분을 다 알려준다.

어판장 한복판 선구점 집 딸로 자라면서 장사꾼의 활기찬 몸짓과 호객 소리 가운데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저잣거리의 악다구니와 기기묘묘한 욕설을 기상나팔 삼아 일어나는 일도 예사였다, 판장 할매의 욕설이 섞인 고함이 점점 커지다가 드잡이까지 가겠다 싶은 순간이 오면 나는 살짝 긴장하며 아버지를 쳐다봤다. 주판을 튕기며 장부 정리를 하던 아버지가 ‘탁’하고 장부를 덮으면서 일어나야 가게 앞에 평화가 찾아온다.
“고만 안 하요? 계속 시끄럽게 할끼면 마 다 쫓아 내삐리끼다. 와 남의 장삿집 앞에다 진을 치고 앉아서 니 자리 내 자리 하고 있소? 요가 장사 하라꼬 만들어놓은 자리요? 응 조용히 몬해?”
매일처럼 벌어지는 자리싸움이 장날이 되면 더 심해진다.
“나또라. 한 개라도 더 팔라고 저라는데”
가게 입구까지 슬글슬금 밀고 들어오는 할매를 쫓아내는 점방오빠를 말리던 아버지는 자리싸움이 심하다 싶으면 불같은 성질로 시장통을 조용하게 만들었다.
아버지는 말이 적은 사람이었지만 외롭게 자란 탓인지 억세고 부산스럽고 날 것의 냄새가 나는 판장의 하루를 좋아했다. 지금도 등대가 보이는 새벽 판장에 서면 구부정한 어깨를 하고 소란스러운 길을 걸어가는 아버지의 뒷모습과 함께 묵혀 두었던 그 시절의 방언이 내 입에서 튀어나오려 한다.
‘아부지 와 그리 일찍 가시십니까’
언어는 사고를 지배한다.
리드미컬한 억양에 미묘한 감정을 싣고 상대의 눈빛과 몸짓의 의미를 단박에 알아내는 남도의 화법은 내 말투뿐 아니라 사고의 체계도 만들어냈다. 표준으로 생각하기를 싫어하고 중심부의 권위에 저항하는 성정은 아무래도 갯가에서 태어나고 자란 때문이다. 국문학과 저널리즘을 공부해 그렁저렁 수십 년 글 밥을 먹고 산 것도 말과 글의 묘미를 알고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는 화술을 일찌감치 배운 덕이라 여긴다.
2년 전 대방 굴항 앞에 작은 아파트를 세 얻어 자주 내려온다.
가능하면 걸어서 바로 갈 수 있는 바다가 있으면 했고 그 바다가 어판장을 끼고 있길 원했다. 서부시장의 어판장은 어린 시절과 달리 쪼그라들고 외곽으로 밀리고 있다. 좌판 시장과 할매의 짙은 사투리가 사라지기 전에 잃어버린 나의 방언을 온전하게 되찾아 두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