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으면서, 준비하는 물건 중 일기장을 고르는 것이 가장 신이 난다.
언젠가부터 나이 먹기는 싫지만, 새해를 계획하고 새 일기장을 적어 가는 순간이 나를 설레게 한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면서 서너 장을 못 넘기고 비워둔 일기장이 두세 권이다.
인터넷이 활발해지면서 가끔 SNS에 긁적이게 되는데, 일기를 적으면서 정리되는 마음과 위로를 그곳에서 받곤 한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일기는 꼭 적어야 하는 숙제였다.
노트를 두세권, 많게는 네 권까지 테이프로 붙여서 검사를 받았던 일기장. 그때의 습관을 다시 들이고 싶다.
아버지는 오랜 시간 일기를 적어오신다. 친정엘 들리면 한 번씩 아버지 일기장을 꺼내 보곤 하는데, 일기라기보다는 기록이라는 표현이 더 맞겠다.
그날의 날짜, 요일, 음력 날짜, 날씨, 우리 집에서, 나라에서 일어난 큼직한 사건들이 기록되어있다.
1983년 11월 7일이 나의 세 번째 생일이다. 저녁에는 비가 내렸고, 제5회 전국 장사씨름대회 폐막이 진주에서 있었나 보다.
백두장사는 홍현욱, 한라장사는 이만기, 금강장사는 손상주, 태백장사는 홍순양이다. 그렇다. 아버지의 일기장을 넘기다 보면 간단명료하게 적힌 내용이지만 그날의 스토리가 그려진다.
일기장을 넘기다 보면 아버지의 꼼꼼하고 예민한 성격도 보인다.
꼭꼭 눌러 적으신 반듯한 글씨 체에서 갑갑하고 조금은 숨이 막히긴 하나 내가 아버지를 존경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일기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또 다른 아버지의 모습을 만난다.
옮겨 적으신 시는 무척이나 따뜻하고 부드럽다. 학창 시절 사진 뒷면에 적어두신 괴테와 헤르만헷세의 글귀들로 아버지가 무겁고 딱딱한 분만은 아님을 알게 해준다.
몇 년 전 부터는 농담처럼 진담을 던진다.
나중에 이 일기장은 딸 주시라고.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있을까? 5대 독자 아들이 있음에도 욕심을 내어본다,
몇해 전엔 아버지를 향한 오해가 풀린 적이 있다.
어릴 적 아버지 방에는 사각 깡통에 십 원짜리 동전이 낮게 깔려있었다. 나는 그 동전을 꺼내다가 친구와 과자를 사 먹었는데 한번씩 아버지가 그렇게 화를 내시는 거다. 나는 그 십원짜리로 화를 내는 속 좁은 아버지로 기억하고 있었다.
몇해 전 가족 모임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씀을 하셨다. 동전을 수집하시는데 한번씩 동전들이 사라져서 속상하셨다고… 우표 수집 하시는 건 알고 있었는데 화를 내신 이유를 알고 나니 수십 년간 속 좁은 아버지의 모습은 사라졌다.
어느덧 칠순을 넘기신 아버지.
몸이 편찮으셔서 병원 생활을 하실 때면, 매일 적으시는 일기를 놓치시는데 앞으로는 그런 날들이 없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날씨가 포근하고 좋은 날엔 문득 생각한다. 오늘은 어떤 내용이 기록될까? 요즘 고양이들과 사랑에 빠지신 아버지
0월 0일 약간의 미세먼지가 있지만 맑음
노랑이가 비둘기를 잡아옴.
이런 내용을 상상하며 혼자 씩 웃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