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사진 김도숙
우리 집은 선창가 가까이 있었다. 새벽녘이나 늦은 밤, 잠자리에 누워서도 ‘부우웅’하고 울던 뱃고동 소리가 머리맡까지 들려오곤 하였다. 어둠 속에 울리던 굵은 저음의 뱃고동 소리는 가슴 밑바닥까지 까닭모를 애수를 자아내었다.
‘갑성호’, ’경복호‘, ‘금성호’, ‘금양호‘, ‘원양호’, ‘창경호’, ‘천신호’, ‘태안호’, ‘한일호’ 등 많은 여객선들이 한려수도를 오갔다. 삼천포, 남해, 여수, 통영, 거제, 마산, 부산까지 오가던 배 안에서는 많은 일들이 일어났으리라.
밤을 지새우는 배 안에는 칼을 지니고 다니는 칼잡이도 있었는데, 주로 돈 냄새를 맡는 소매치기들이었다. 자다가 항구에 내릴 때 쯤, 지갑이나 돈 뭉치가 없어진 일들이 비일비재하였다고 한다. 바다를 끼고 있는 도시는 거칠고 억센 패거리들이 많았다.
‘통영에 가서 돈 자랑 말고, 여수에 가서 힘 자랑 말라‘는 말도 있었던 걸 보면…….
삼천포는 그 중간 쯤 되는 곳이었으리라.
그 후 ‘엔젤호’ 라는 쾌속정이 생겨 지루하고 긴 뱃길 이동시간을 단축시켜 주었다. 그러나 도로가 잘 닦이고, 차량이 많아지자 한려수도를 오갔던 그 많던 여객선들은 자취도 없이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삼천포항도 예전 같지가 않다. 바다의 어획량이 확 줄고, 많은 어종들이 멸종 위기에 놓여 있다. 한때 왁자지껄하던 선창가의 풍경도 이제는 옛이야기가 되었다.
지금은 삼천포 바다 유람선을 타기 위해 찾는 관광객들이 주로 삼천포항을 찾고 있다. 용궁수산시장이 정비되기 전 시장에는 난전에서 물고기나 수산물을 팔던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집 앞을 걸어 나가면 언제든 손쉽게 살 수 있었던 생선과 수산물들. 어머니는 가족들을 먹이기 위해 아침 시장에서 싱싱한 것들을 한 바구니 사 오셨다. 그 때 그 시절이 더 정겹고 사람 냄새가 나는 것은 나만의 그리움일까?
선창가 동쪽에 지금은 사라진 ‘상업은행’ 뒤로 ‘은파다방’이, 서쪽 부두 쪽에는 ‘환성다방’이 있었다. 그곳은 배 시간을 기다리거나 부둣가에서 사람을 만나기 좋은 장소였다. 남자들이 주로 이용하던 다방에는 커피와 프리마, 설탕이 2대 2대 2의 비율로 잘 어우러진 커피와 계란 노른자를 동동 띄운 쌍화차가 인기 메뉴였다. 화장을 짙게 한 다방 레지(레이디)가 가져다주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와 손님들이 뿜어내던 담배 연기가 공중에 동그랗게 피어오르던 곳이었다.
어획량이 예전보다 무척 많이 줄었지만, 다행히 수산시장에서는 그나마 팔딱거리는 생선들을 여전히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생선회를 먹기 위해 주말이면 많이 찾아 온다. 또, 생선을 햇볕과 바람에 말리는 광경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바람과 햇볕에 꼬들꼬들 말라가는 생선의 모습이 낯익고 정겹다.
삼천포 등대 가는 길에는 등대 방파제 아래 어구를 보관하는 곳이 새로 만들어졌고, 그곳에서 통발이나 그물을 손질하는 사람도 가끔 볼 수 있다. 생선이 많이 잡히던 시절에는 연방 얼음을 갈아내던 제빙공장들도 성행하였다.
바다를 토대로 살아가는 이곳 삼천포 사람들에게는 바다가 삶의 한 부분이다. 바닷가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바다를 떠나 살 수 없는 사람들이다. 가슴 밑바닥에 늘 바다를 품고 살기 때문이다.
한때는 흥성거렸던 이 항구가 지금은 사천시 삼천포항이라는 이름만으로 남아 있지만, 선창가에 서면 뼛속 깊숙이 박혀 있는 바다의 생명력과 코끝에 배여 있는 갯비린내와 소금처럼 짭조름한 삶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