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신보를 아시나요?

대학 졸업 후 학원 강사로 2년 정도 일하다가 1990년, <삼천신보>라는 지역신문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그 당시에는 지방화 시대를 대비하여 시군 단위의 지역신문이 이곳저곳에서 우후죽순 유행처럼 창간되고 있었지만, 이렇다 할 체계도 없었고 재정 또한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입사했을 때는 시군 통합 사천시가 출범하기 전이었지만, 취재 영역은 삼천포시와 사천군을 포괄하고 있었다. 직원이라고 해봐야 사장, 편집국장, 논설위원, 그리고 취재기자는 나 혼자였고, 광고영업부장, 경리까지 총 6명이었다. 결국 편집국장과 논설위원, 나, 이렇게 셋이서 우찌우찌 지면을 채워 격주로 신문을 만들어 내는 셈이었다.

1989년 8월 3일 정기간행물 등록 후 창간되기 이전 창간준비호가 발행되었고, 내가 입사한 후 1990년이 되어서야 정식 창간호가 나왔다. 대부분의 지역신문들은 지금의 무료주간지처럼 크기가 작은 ‘타블로이드’ 판형이었지만, 삼천신보는 일반 일간지와 같은 ‘대판’ 판형이었다. ‘대판’ 판형 8면, 또는 12면의 지면을 셋이서 2주 만에 다 채우는 것도 힘에 부치는 문제였지만, 어쩌다 보면 열흘이 훌쩍 지난 기사도 있어 새소식이 아니라 헌소식이 되는 등 웃지 못할 일화도 많았다. 다행인 것은 사무실에서 주는 큰 카메라 어깨에 걸치고 취재수첩 들고 관공서는 물론 이 마을 저 마을 다니며 사람들 만나며 취재하는 일이 나름 적성에 맞고 제법 보람도 있었다.

입사 후 그럭저럭 혼자서 외로운 기자생활 1년이 지나고 1991년, 대대적으로 신입기자 모집 광고를 통해 대구, 부산, 진주에서 대학을 졸업한 새내기 기자들을 5명이나 채용하는 등 조금씩 체계를 갖추어 신문사다운 면모를 보였다. 그동안 닥치는 대로 이런저런 다양한 기사를 좌충우돌 혼자서 쓰다가 3개월 수습딱지를 뗀 신입기자들과 기사를 종류별로 나누어 분담하게 되었다. 스트레이트, 해설, 논설, 기획기사는 편집국장과 논설위원, 다른 신입기자들이 나누어 맡고, 좀 여유롭고 쉬운 탐방, 인터뷰기사를 내가 맡았다. 그때부터 일이 있으나 없으나 지역 구석구석을 기웃기웃 어슬렁거리며 다녔다.

처음으로 서삼면이라는 곳을 다 가보았다. 곤명, 곤양, 서포지역을 서삼면이라 부른다는 것도 그 때 알았다. 3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가끔씩 머릿속에 그려지는 마을이 있다. 곤명면 은사리. 은사마을은 벼슬에 나아가기를 싫어한 선비들이 은둔해 살았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진 만큼 오지 중 오지다. 경상남도 지정 기념물인 세종대왕과 단종 태실지가 있는 곳이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그 때만 해도 길도 제대로 없었고 관리 보존 상태도 부실했다.

 

그 때 만난 사람들

기자로 일하던 3년 동안 여러 곳을 다니며 참으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1984년 대학 1학년 여름방학이 시작되자마자 일주일간 남양에서 숙식을 하며 삼천포12차농악을 배운 인연이 있던 박염 선생님이 1990년 제1회 삼천포시민문화상을 수상하게 되어 반가운 마음에 축하 인사도 드릴 겸 직접 찾아가 인터뷰를 했었다. 박염 선생은 삼천포12차농악에서 설장구 개인기로 유명하신 분이다. 통통 튀는 장구 잔가락에 맞춰 상모를 돌리며 춤추는 재간은 가히 일품이다. 난 12차 전수 때 선생님께 꽹과리를 배웠는데 꽹과리 솜씨 또한 어찌나 황홀한지 그 가락에 취해 한참 넋을 잃기도 했다.

박재삼 시인이 고향 삼천포를 방문한다는 소식을 지역문인들에게 전해 듣고 실안 청하횟집으로 달려가 뵌 적도 있다. 간단히 식사를 함께 한 후 자리를 옮겨 유년의 기억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팔포와 노산공원 일대를 거닐며 나누었던 몇 마디의 대화에서 시인의 시 세계와 작품에 깃든 정서를 조금은 더 이해하게 되었다. 숫기 없으시고 차림새 또한 참으로 수수하셨고, 말씀 또한 조곤조곤하셨다.

뿐만 아니라 1991년에 대하소설 <백정> 전10권을 완결해 전국적으로 화제가 된 시인이자 소설가인 정동주 작가를 용현 자택에서 만나 <백정> 집필 과정에 얽힌 긴 이야기를 나누는 행운까지 누리게 되었다. 큰 통창으로 된 집필실 한 쪽 벽면을 제외한 다른 벽면에는 대하소설 백정 등장인물 가계도가 빽빽하게 그려져 있었다. 처음으로 유명작가의 집필실을 엿보았다. 차를 나누며 대담을 하는 동안 살펴본 정동주 시인은 역동적이고 사실적이었으며 자신감이 넘쳤다. 소설 자료 수집을 위해 전라도와 경상도를 헤집고 다니며 취재와 집필에만 10년을 바쳤다고 했다. 1만2천장에 이르는 백정은 1862년 진주농민항쟁을 기점으로 1896년대 말까지 백정들의 삶과 투쟁을 통해 조선민중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또 기억에 남는 한 분이 있다. 와룡산 기슭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계신 도예가 창산 윤창기 선생이다. 지금의 창산요와는 달리 30년 전에는 맞은편에 쓰러져가는 폐가 같은 곳에 가마가 있었다. 들어가는 길목도 외지고 잡초가 우거져 사람 사는 집이 맞나 의심이 들 정도였지만, 주변 곳곳에 쌓여있는 깨뜨려 버린 사금파리들을 보고 겨우 찾아갔던 기억이 난다. 장작불 가마도 보고, 직접 물레 돌리며 자기 빚는 모습도 보고, 방안에 모아둔 작품들도 감상하며 한나절을 보냈다. 취재를 다 마치고 나오는 나를 붙잡아 앉히고는 손수 빚은 귀한 5인 다기세트를 선물이라며 내 놓으셨다. 당연히 처음엔 받지 않겠다고 만류했지만 작은 성의라고 하셔서 감사히 받아왔다. 30년이 넘은 지금도 윤창기 도예가가 선물로 준 다관과 숙우, 찻잔 다섯 개가 원목 찻상에 놓여 우리집 거실 한 켠을 장식하고 있다.

영혼이 따뜻했던 내 젊은 날,
문득 그 때도 그 시절도 그 사람들 또한 그립다.

장 을 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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