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시대요, 휴대전화 문자 시대의 절정기를 맞아 바야흐로 끝 간 데 없이 넘쳐나는 활자공해가 도리어 언어를 질식시키는 어지러운 세상이다.
정작 심금을 울리는 글들은 점점 보기 힘들어지고, 출판업계도 그저 상업적 가치로만 환산되는 소위 잘 팔리는 기획물들만 마구잡이 찍어내 실로 풍요로운 책 세상으로 변한 지도 오래고, 정신의 등가물(等價物)이라던 문학에 대한 전통적 인식과 관념도 바뀌고 있다.
이런 시대에 김인배 작가는 자신의 심경을 고백하기도 하였다.
“이제는 문학이며 기타 예술도 모두 물질적 재화 가치와 연관 지어 따지게 된 세상에서 문학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회의만 깊어질 뿐입니다. 능률과 생산성을 추구하는 이 거대 기술 산업사회 속에서 진정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리고 그런 현실에 대처하기 위해 대관절 소설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은 명색이 이 땅에서 소설가로 행세하는 나 자신을 한없이 무기력하게 만듭니다.
도대체 문학(혹은 소설)은 내게 무엇인가? 나는 왜 소설을 쓰는가? 무엇을 쓸 것이며, 어떻게 쓸 것인가? 등등.
그럴 때마다 이젠 고인이 된 문학평론가 김현 교수가 내게 대해 지적했던 언설들을 떠올립니다.
김현 씨는 <문학과 지성> 편집자 중 한 사람이었고, 나 역시 바로 그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관계로 잘 아는 사이였기도 합니다. 그는 생전에 자기가 읽은 책들에 대한 소감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나의 행복한 책읽기>에서 나의 첫 소설집 ⌜하늘궁전⌟을 읽은 뒤의 소감도 있었습니다.
내 소설들의 내용적 특성을 <그림자 지우기>로 요약한 그 평설의 첫머리에 “김인배 소설은 아름답다. 그리고 그의 소설은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로 시작되는 그 부분은 두고두고 내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습니다.”
– 경남문학 2007년 봄호 <김인배 집중조명> 중에서
데뷔작 ⌜방울뱀⌟에서부터 ⌜열린 문 닫힌 문⌟까지
작가의 데뷔작인 ⌜방울뱀⌟에서는 ‘나(김기호)’의 마음속에 드리운 삼촌의 그림자와 월남전에서 자살한 부하 강 병장의 그림자를 애써 지워 나가는 과정을 통해, 또, 중편 ⌜극락선⌟에서도 역시 ‘송랑’의 삶 속에 그늘을 드리운 아버지와 형 ‘충랑’의 그림자를 지우려는 노력을 통해 이들 주인공은 제각기 내면의 어둠을 극복함으로써 삶의 진정성에 도달하고자 하였다.
특히, 중편 ⌜문신(文身⌟에서는 이 점을 극한까지 몰아가는 방식으로 그리고 있다. 이를테면, 무명화가 ‘문지룡’의 삶 전체에 드리운 유전병에 대한 공포의 그늘과 인간 본성에 대한 짙은 환멸의 그림자에 짓눌려 생을 포기해 간 인물에 대해 추억하며, 자초지종을 독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서술자인 ‘김지수 화백’의 마음속에 드리운 그 불행한 사내의 그림자를 지워 나가는 과정이 그려져 있다.
김인배의 문학관 내지 소설관에 대해 알아보면, 문학의 기본적인 조건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언어 소통이라면, 그는 소설을 통해 가장 아름다운 언어 소통을 이뤄내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겼다. 같은 동물이면서도 사람과 짐승의 종차(種差)는, 오직 인간만이 언어로 깊이 사유할 수 있다는 점이다. 문학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에 감사하고 또 행복해 했다. 그런 그에게 소설의 창작이란 언어의 아름다운 소통으로 타인과 관계 맺는 행위와 다름없었다.
더욱이 딴 장르에 비해 소설이야말로 치밀한 언어의 조합과 엄격성을 요구한다. 의사 전달 면에서도 사고의 통제에 가장 신경을 써서 표현해야 하는 것이 소설 문장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소설가는 모국어의 아름다움을 가장 잘 다듬고 가꾸어야 할 책무가 있다고 그는 말했다.
그리하여, 자기만의 독특한 문체 획득을 통해 ‘슬픔’까지도 아름답게 그려냄으로써 아무쪼록 자신의 작품이 ‘아름다운 소설’로 평가받고 싶어 했다.
삶의 진정성과 역설의 진리
그의 초창기 소설들을 되돌아보면 대체로 일상의 사소한 사건들을 다룬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이후에도 그가 써온 소설들은 대개 거창하고 극적인 줄거리가 드물다. 대신, 섬세한 인간의 내면을 그리거나, 또는 개인적 삶의 가치관이 동시대 사회의 다른 조건과 부딪칠 때 일어나는 갈등 앞에서 진정한 삶이란 어떤 것인가를 등장인물로 하여금 독자에게 묻는 내용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저변에 언제나 ‘욕망’의 문제가 개입돼 있다. 한 마디로 김인배 소설의 키워드는 욕망이었다. 꿍은 욕망의 표출이며, 희망도 같은 뿌리에서 솟는다. 따라서 생명의 근원적 본능인 욕망의 본질에 대한 탐색이 이전의 그의 소설 기조를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걸작 한 편 남기지 못하고 매너리즘에 빠져 지식인의 자의식을 그린 고만고만한 소설들에 스스로 식상하여 1998년 이후부터는 아예 소설 쓰기를 그만두었다. 그 대신 전부터 몰두해 오던 역사 공부에만 전념하면서 그 방면의 논문들과 저술 활동에 몰두하였다. 그 과정에서 나는 세상의 돌아가는 이치를 발견하게 되었다.
지나간 것은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이 생겨나게 하는 동인(動因)이며,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역사다. 사라짐이 없다면 다시 시작할 수도 없다. 역사 공부를 통해 얻은 교훈과 대상의 이면에 감춰진 세계에 대한 새로운 발견은 나 스스로를 깨우는 깨달음으로 이어졌다.”
-월간문학 2017. 2월호 <김인배 소설가 – 나의 작품 어디까지 왔나> 중에서
요컨대 그가 발견한 것은 다름 아닌 – 세상 모든 사물의 근본 원리이기도 한- ‘역설의 진리’ 였다. 예를 들면, ‘마지막은 새로운 시작의 출발점이라거나, 마음이 가난해야 행복하다거나. 비워야만 채울 수 있다거나, 또 아파야 성숙해 진다.’ 같은 역설은 단순히 문학적 수사학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삶의 진리임을 절실히 깨닫고 있었다. 그 깨달음은 우리가 소위 명작이라고 칭송하는 문학 작품들 속에서 독자들이 얻는 커다란 즐거움과 감동의 소산으로 이미 경험한 바 있었던 것이다.
그는 뒤늦게 역사 연구를 통해 발견한 것들을 다시금 소설로 써보고 싶어 했다. 다만 소설의 기본인 ‘허구의 진실’에 이르기 위해 독자들에게 어떤 울림과 격조로 다가갈 것인지, 혹은 이 역설의 진리를 메시지로 전달할 방법과 감흥의 공감대를 어떻게 형성할 것인지가 큰 과제라고 하였다.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그는 2008년부터 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휴지기(休止期)가 길었던 만큼 창작에의 욕구도 강해졌다. 그해 소설집 ⌜비형랑의 낮과 밤⌟(2008)의 출간을 계기로 연이어 중·단편들을 여러 문예지에 발표했고, 장편소설 ⌜바람의 끝자락을 보았는가⌟(2012)에 이어 또 다른 장편소설 ⌜오동나무 꽃 진 자리⌟(2015)도 출간하였다.
그리고 2013년부터 2015년까지 3년에 걸쳐 완성한 장편소설 ⌜열린 문 닫힌 문⌟이 2018년 말에 출판되었다. 특히 이 소설은 역사논문과 소설의 경계를 허물어, 일종의 새로운 문학 장르를 실험해 본 특이한 글쓰기 형태를 취하였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이야기체로 쓴 논문’이랄 수 있겠다.
⌜열린 문 닫힌 문⌟은 첨성대 설계도의 비밀에 얽힌 놀라운 역사적 사실과 이에 수반된 진실들- 선덕여왕과 명랑법사와의 관계 및 경주박물관에 있는 ‘인면(人面) 유리구슬‘의 정체와 경주 배반동 ’내리들‘을 중심으로 설계된 구궁팔괘도(九宮八卦圖)의 불교적 얀트라(圖上) -등에 관해, 지금까지 학계에서 전혀 알지 못한 엄청난 수수께끼의 진상을 밝히고자 하였다.

또, 신라시대 명랑법사가 중국을 통해 티베트와 라오스, 베트남,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의 보로부두르 사원까지 다녀 온 여정을 상세하게 그리고 있다. 세상의 중심에 있다는 전설 속의 수미산을 이 지상에 실현한 보로부두르 사원을 신라의 서라벌 첨성대와 연결한 역사적 사실을 상상력으로 유추하여 밝히고 있다.
오랫동안 삼국유사와 고대사를 연구해 온 작가의 놀라운 발견들이 이 소설 곳곳에 반영되어 있다.
그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일종의 자기 존재 증명 같은 것이었다.
또한, 그의 바람은 자기만의 “아름다운 문체로 한국 소설사에 한 부분 기여했던 소설가로 기억되고 싶다”는 말을 경남신문(2008년 3월 28일자 문화면)에서 밝힌 적이 있다.

<소설가 김인배> (1948~ 2019)
사천(삼천포항)출신, 1975년 문학과 지성에 소설 ‘방울뱀’으로 등단. 1980년대 ‘작가’ 동인으로 활동함. 1982년 현대문학에 중편 ‘물목’이 그해의 소설로 선정되고, 조명화 감독에 의해 영화화 됨.
⁍ 소설집 : ‘하늘궁전’, ‘문신’, ‘후박나무 밑의 사랑’, ‘비형랑의 낮과 밤’, ‘바람의 끝자락을 보았는가’ ‘오동나무 꽃 진 자리’, ‘열린 문 닫힌 문’ 등
⁍ 우리말 연구서 및 한일 고대사 연구서 : ‘전혀 다른 향가와 만엽가’, ‘일본서기 고대어는 한국어’, ‘고대로 흐르는 물길’, 역설의 한일 고대사 任那新論’, ‘일본천황가의 한국식 이름 연구 神들의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