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래진 박스

춥다는 핑계로 움츠려진 몸은 게으름과 함께 겨울을 보내고 있다.

공방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어느 곳도 손대기 힘들 정도로 냉랭해서, 수업 준비만 하고 후다닥 나오게 된다. 수업이 없는 날은 굳이 나가지 않아도 되지만, 나를 기다리고 있는 길냥이들은 어쩌랴. 이 추운 날 배까지 고프면 더 춥고 마음이 시리지 않겠나. 그런 마음으로 밥만 챙겨주고 나오기를 한 달. 그렇게 엉망이 되어가던 공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새해이기도 하고 정리하다 보니 묵은 물건까지 끄집어내 본격적인 정리가 시작됐다.

 

이것저것 꺼내다 보니 낯익은 플라스틱 통 하나가 나온다.

몇 년간 사용하지 않는 물건은 버려야 겠다고 옆에다 젖혀두었다. 정리하는 내내 눈이 자꾸 간다. 아무래도 저 통이 강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들고 다니던 통이지 싶다. 공예 강사인 분들은 잘 알 것이다. 외부 수업 재료들을 플라스틱 통에다 넣어 다니는 것을.

첫 강사 생활은 문화센터에서 시작하였다. 원장님께서 삼천포에서 수업 문의가 들어 왔는데 인원은 적지만 나에게는 좋은 기회인 것 같다고, 이력서에 경력 한 줄 적을 수 있으니 해보라며 권해주셨다.

 

봄학기를 시작으로 벚꽃이 피는 도로를 달리며 꽃구경도 하고, 수업도 하고 돌아왔다.

한주 한주. 벚꽃이 피고, 꽃잎이 날리고, 잎이 나고, 그 잎이 무성해지고.. 노랗게 붉게 물이 들었다. 그때 나의 옆, 조수석에서 늘 함께했던 플라스틱 박스.

버리려고 놓아둔 박스로 자꾸 눈이 간다.

박스를 두고 추억을 기억하고 의미를 부여하니 마음이 약해진다.

버리질 못하겠다.

 

언젠가 또 사용할 거라고 놓아둔 재료와 물건들이 5년 이상 묵혀 있었다. 차마 다 버리지는 못하고 반은 정리하였다. 버려야 정리가 된다고 하였는데 쉽게 그러질 못하고 있다. 이 또한 나의 불안 때문이지 싶은데 물건들을 치우고 버리게 되면 나의 일들과 추억들이 날아가기라도 할까 불안한 것일까?

내내 눈길이 갔던 박스는 결국 버리질 못하였다.

 

사용하는 데는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어느덧 바래진 박스. 박스도 나이를 먹나 보다.

올해는 한 번씩 이 박스를 들고 수업을 다녀보고 싶다. 그때의 설렘과 열정을 기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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