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 여행자의 시선_걸으며 생각하며 Ep.2]
무지개꽃이 피었습니다
이순신바닷길 2코스, 선진리성~모충공원
글・사진 조영아
지난 여정의 꼬리를 물고 다시 걷다
마치 꼬리잡기 놀이라도 하듯, 지난 여정(대곡숲~선진리성)의 꼬리를 물고 다시 걷는다. 저녁놀 물든 사천만의 아름다움에 취하려면 오후 늦게 출발하는 것도 괜찮겠다 생각했지만, 뼛속까지 배인 부지런함이 이른 아침부터 나를 길 위에 세운다.(심지어 출근하는 시간보다 더 이른 시간에!) 저 좋아서 하는 일, 누가 말리랴!


아침 이슬 머금은 선진리성을 지나 종포산단으로
아침 8시, 뺨을 스치는 공기가 제법 차다. 어제 내린 봄비 때문이리라. 다시 만난 선진리 바다는 지난 여로의 끝자락에서 만난 모습과는 사뭇 다른 얼굴로 나를 맞는다. 아침 이슬 머금은 잔잔한 미소가 마음에 든다. 잠깐 바다가 안 보이는 구간을 지나는데 햇살이 잘 드는 곳에 봄비에 성큼 자란 쑥이 보인다. 아아, 나의 쑥 사랑 썰說을 여기서 풀기에는 지면이 모자랄 듯… 나는 거의 쑥 예찬론자다! 쑥을 먹는 것도 좋아하지만 ‘캐는 행위’ 그 자체를 좋아한다. 따사한 햇살을 등에 지고 쑥을 캐고 있으면 얽히고설킨 복잡한 문제들이 어딘가로 사라지고 마음에 평화가 찾아온다. 올해도 직접 캔 해쑥으로 튀김을 해서(나만의 비법이 있다!) 사무실 선생님들 쑥향 제대로 맛보게 해줘야 하는데…
오르막을 넘어 내려가니 좌우가 극명한 풍경이 펼쳐진다. 좌로는 종포산단 공사현장이, 우로는 태고의 자취가 남아 있는 듯한 작은 섬 하나가 먼발치서 인사를 한다.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라 할지 모르지만,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웃은 개발의 두 얼굴이 씁쓸하기만 하다. 얼마 전 산단 공사로 고향을 떠나야 했던 한 다문화 가족의 얼굴이 눈에 아른거린다.


최애最愛 스팟spot을 발견하다!
어쩌다 ‘종포산업단지’ 표지석을 우연히 만나면 부디 가던 길을 멈추고 바위 뒤편으로 이어지는 해안 산책로를 걸어보라. 내 기준, 이순신바닷길 2코스 ‘최애 스팟’이 그곳에 숨어 있다! 산단의 대다수 공장들이 작업을 멈추고 근로자들이 고향으로 집으로 떠난 주말, 산책로는 고즈넉한 정적이 흐른다. 오롯이 홀로 당당하다. 누구라도 품어 주고 도닥여 주는 여유가 충만하다. 어느 날 이 길을 지나게 되면 여기서 지친 하루의 긴 쉼표 하나 찍고 가도 좋으리. 어느 누구라도!


사천에 산다는 것이 감사의 이유가 되는 순간
종포산단을 지나 개통된 지 얼마 안된 반짝반짝한 신작로를 굽어 돌면 종포마을이다. 해안가 무지개빛 방호벽 사이사이에 사람들이 여럿 보인다. 마을에 무슨 행사가 있나 싶었는데, 가까이 가보니 출사 나온 외지 사람들이다. 이 동네 근처 산다고, 묻지도 않은 답이 입술을 간질였다. 사천에 산다는 것이 감사의 이유가 되는 순간, 바로 지금이다! 일면식도 없는 사이지만 이런저런 사는 얘기도 하고 사진 잘 찍는 비법 한 수 배워보고 싶은 마음 간절했으나… 이럴 땐 숫기 없는 내 성격이 좀 못마땅하긴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가던 길 갈 수밖에. 그래도 출사 나온 사람들 덕에 인위적 피사체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엉성하기 짝이 없는 사진이지만.(언젠간 꼭 사진을 제대로 배워보리라, 다짐만 수백 번이다!)

무지개꽃이 피었습니다. 그것도 화알짝~
종포마을에서 시작한 무지개빛 방호벽은 당간마당 앞에서 그 존재감을 확실히 드러내더니 용현면 금문리 해안도로에서 절정에 다다른다. 빨.주.노.초.파.남.보, 또 빨.주.노.초.파.남.보…… 무지개꽃이 피었습니다. 그것도 화알짝~ 3년 전쯤인가, 용현 해안도로 방호벽이 무지개빛 옷을 입기 시작했을 때 솔직히 좀 촌스럽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타공인 사천의 빼놓을 수 없는 명소, 핫플hot place이 되었다! 일곱 빛깔 무지개꽃의 향연은 이후로도 한참을 이어지다가 남양 모자랑포 어귀에서 멈춘다. 하늘, 바다, 무지개빛 해안도로의 삼합이 가히 환상적이다. 시쳇말로 뷰view 맛집이랄까.


최초 거북선길, 그리고 귀인貴人을 만나다
모자랑포 해변 표지판에 거북선 최초 출전지라 적혀있다. 아하, 그래서 이순신바닷길 2코스를 ‘최초 거북선길’이라 하는구나! 사천해전에서 거북선이 최초로 사용되었다는 이야기는 알았어도 그 장소가 모자랑포였다는 것은 처음 알다니… 공부 좀 하시라 제발!
두 개의 장례식장 앞을 지나 송포농공단지를 향한다. 여기에, 작은 이정표 하나 있었으면…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음산한 굴다리를 마음 졸이며 통과하니, 남양 언저리다. 신송, 사촌, 송천, 중촌… 이 이름 중 한 마을이리라.(아마도 사촌마을인 듯.) 큰길로 나왔는데, 갑자기 모충공원 가는 방향이 헷갈린다! 차로는 숱하게 오갔던 길인데 두 발로 걸으니 세상이 달리 보인다? 그때, 귀인을 만났다! 길모퉁이에 사시는 한 어머니가 바로 그분이다. 따사한 봄볕을 온몸에 쬐이면서 집 마당에 난 풀을 호미로 메고 계신 어머니는 길을 묻는 낯선 이를 격하게 반기신다. 마치 멀리 사는 자식이 연락도 없이 온 것마냥. 가던 길로 쭉 가면 된다고만 하면 될 것을 마치 연극배우의 과장된 몸짓처럼 온몸을 움직이며 길을 설명하고 또 설명한다. 사람이 그리우신 건지, 원래 친절한 분이신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마음이 따뜻해지는 이 느낌이 좋다. 건강하세요… 어머니!

꽃이 피고 바람 살랑이면은
오늘의 종점, 모충공원에 도착했다. 현재 시각 12시 10분. 느릿느릿 걸어서인지 4시간여는 걸린 것 같다. 몇 년 전 벚꽃 날리는 모충공원 정상 잔디밭에서 아이들과 배드민턴도 치고 도시락도 먹고 낮잠도 자고 그랬는데…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진다. 팬데믹이 앗아간 평범했던 일상이 한없이 그리워지는 순간이다. ‘꽃이 피고 바람 살랑이면은 우린 다시 돌아갈 수 있다고…’ 가수 이적의 노래 ‘당연한 것들’의 가사 한 구절이다. 이제, 그 계절이 왔노라 목청껏 노래하고 싶다.
※ 개인적인 지식과 생각에 의존하여 작성된 글이라 일부 내용이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여행일 2022-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