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것들은 숲속에 있다

신발도 제 걸음 아끼고 싶다

곤양 대밭고을 바람의 언덕을 넘어서면 다솔사*다. 대와 솔의 인연은 인간이 넘볼 수 없는 우주일까. 그들의 바람은 가슴 조인 단추를 일거에 찢어버리는 격한 카타르시스가 있다. 솔숲 터널에 든다. 전조등을 밝히고 속도를 줄여야 하지만 이 숲에서는 어둠을 질주하는 유성처럼 모든 걸 맡기고 싶은 충동이 인다.

노송들의 살짝 기운 키가 기대 사는 우리처럼 정겹다. 얼핏 하늘을 삼킨 듯 갑갑하지만 창호지처럼 여백을 살린 솔잎 사이로 차곡차곡 착륙하는 햇살의 미동이 아늑하다. 대숲을 닮은 바람이 찰랑거린다. 길을 신고 가는 발걸음이 새들의 날갯짓보다 가볍다. 늘 목적을 향해 바삐 가야 할 신발이지만 그도 제 걸음을 아끼고 싶은 순간이다. 고찰의 단청이 목어를 타고 숲을 유영한다. 너울너울 평화로운 물결이 숲의 바다다. 지친 숨이 속도를 접는 쉼터, 삶의 회색 무게들이 무장 해제되는 숲은 그대로가 생명이다.

길이 물을 건너가는 다리를 지나, 산신각에 내걸린 소망등 하나 훔쳐 메고 보안 석굴암*으로 향한다. 숲의 호흡들이 배낭에 매달려 살랑살랑 콧노래를 부른다. 잔돌이 나뒹굴고 바위가 박혀있고 밑 풀이 고개를 치켜세우고 다 큰 나무들이 슬며시 햇살 길을 열어주는 산길은, 아옹다옹 살면서도 기꺼이 마음 나누어 주는 우리와 닮았다.

산속 체육공원에도 바람과 햇살과 산새들과 묵은 가지들이 모여 운동 중이다. 마른 솔잎들이 소복이 내려앉은 평상은 벌써 가을 산 도색작업을 모의하고 있다. 아직 이 구역 최고 달변가는 매미인 모양이다. 노송들이 허허롭게 내려다보고 있는 숲길에는 바람이 그들의 평화를 생중계하고 있다.

 

바람이 차려놓은 숲속 도서관

선경에 드는 걸까? 속세의 울타리를 넘어서자 여래상이 손을 내민다. 합장한다. 오직 하늘로 통하는 길인 듯 거대한 숲의 싱크홀 안에 안긴 불국정토, 보안 석굴암이다. 이끼 머금은 부석을 이고 선 세월이 돌 속에 차곡차곡 잠들어 있다. 바람도 감히 범접하지 못했는지 풍경을 깨우고선 고목 위에서 장삼만 만지작거린다. 번뇌하는 바람을 눈치챘는지 풍경소리에 환하게 미소 짓는 석조여래의 눈가에 삼배를 올린다. 인생은 타이밍이라고, 부처님 웃으실 때를 놓칠 수 없는 일이다.

이 쯤 숲 밖이 궁금해진다. 그늘에선 햇살이 그립고 땡볕에선 그늘이 구세주인 법. 숨겨둔 책방으로 향한다. 남쪽으로 오솔길을 빠져나오면 거대한 책 더미 두 뭉텅이를 만난다. 내 숨이 휴양하는 뷰 맛집이다. 차곡차곡 책을 쌓아 놓은 듯 포개진 바위에 올라서면 다솔사의 봉긋한 산줄기 타고 포근한 사천의 넓은 들과 산과 너른 바다가 엄마 밥상처럼 포실하게 차려져 있다.

 

망망대해 홀로 선 섬처럼 고요와 적막이 쫄깃하게 베여 있는 수행 공간 같다. 순박한 고목 숲 구릉이 병풍처럼 등 뒤를 감싸 안은 채 오붓한 반석을 깔아놓아 거침없는 조망의 희열을 전해주는 이곳에서는 말도 생각도 사족이다. 내 눈이 가는 데까지 날개를 달아준다. 살아온 기억들과 적재된 추억들과 그려나갈 조각들이 어느새 천 겹 만 겹 엮어진 우리네 삶. 가만히 펼쳐 놓으면 바람이 넘겨주듯 능히 읽어낼 수 있을 거라고 일러주는 책바위는, 노송이 사서로 근무하고 있는 나의 인생 도서관이다. 뒤범벅이 된 땀을 씻고 돌아오는 숲길 너머 건강한 땀이 다시 그리워진다. 대밭고을 바람을 내려주고 오면, 나도 세상도 예전의 그것이 아닌 것 같다.

 

* 다솔사 : 곤명면에 있는 사천의 대표 고찰
* 보안석굴암 : 사천 봉명산 자락에 있는 석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