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돌봄(春), 김장

“이제 게임을 해볼게요. 제가 옆 사람에게 단어 하나를 이야기할 거예요. 연상되는 단어를 옆 사람에게 전달하세요. 마지막에 어떤 단어가 될지 한번 지켜볼까요?”

게임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진행자는 말을 마치고 옆 사람의 귀에 작은 소리로 어떤 말을 전달한다. 모두가 숨죽이며 지켜본다. 옆에서 옆으로. 이제 내 차례다.

내 귀에 들리는 단어는 “김장”.

‘아~ 엄마구나’ 왠지 모르게 눈물이 쬐끔 나올 거 같았다. 입에 담으면 금세 들킬 것만 같아서 그냥 옆 사람에게 “배추”라는 단어를 전달했다. 8명의 단어전달이 끝나고 마지막 단어는 “김치”였다. 진행자는 참 신기하다고, 자신이 처음 전달한 단어는 “엄마”였다고 했다. 역시나.

결혼 후 집안일이 나의 직업이 되었을 때, 막막했다.

시골에서 부모님이 들판을 나가시면 청소는 내 담당이었다. 역할 분담이 나름 확실한 가정생활을 했었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는 라면을 끓이면서 부엌 생활을 시작했고 자취를 하면서 내가 먹을 음식 정도는 무난히 해냈다. 그런데 가정을 책임지는 주부로서의 집안일은 무게감이 달랐다. 가족 구성원이 늘수록 살림이 늘고 치워도 다시 어질러지며 한시도 만족감을 허락하지 않았다. 가족의 건강을 책임지는 식탁은 더 골칫거리였다. 요리에 취미도 없고 싱겁게 먹는 편이라 개미가 없는 음식들로 자주 다툼까지 이어졌다. 음식이 없어서 못 먹는 게 아니라 입에 안 맞아서 못 먹는 일도 나름 큰 문제였다.

일상생활에는 지장이 없지만, 상당히 거슬리는 혓바늘 같았다.

시간이 지나야 나을 일이었다. 낫기까지 다른 곳은 이상이 없는지 잘 돌아보고 쉬어가면서 몸에 좋은 것을 먹어야 한다. 우리의 가정도 그리했다. 우선 왜 이리 힘든지 돌아보면서, 서로가 할 수 없는 것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하면 안 좋은 강박증이나 과한 책임감을 내려놓았다. 그러면서 비난하던 것을 멈추고 이해하려 노력했고, 각자가 원하는 것을 스스로 하면서 집안일은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다. 그 와중에 애들도 자라나서 가족 구성원 모두의 일이 되었다.

청소는 모두 나누어서 하고 음식은 주로 내가 책임을 지지만 남편과 아이들도 한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특정인에게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만들어서 함께 나누었다. 원하는 것을 알고 만든 요리는 맛이 좋았다. 큰아들은 라면을 잘 끓이고, 남편은 고기를 잘 굽고, 둘째는 계란프라이를 잘한다.

라면을 생각하면 큰아들이 떠오른다. 가끔 먹고 싶어지면 아들에게 끓여줄 수 있는지 물어보고 부탁을 한다. 라면 그까이거! 쉬워 보여도 자기가 하던 일을 멈추고 물을 끓이고 잘 익는지 지켜봐야 한다. 시간을 보내고 정성을 쏟고 마음을 담아야 완성되는 한 그릇의 라면.

그 수고로움을 알기에 소중하다.

엄마들 사이에선 ‘남이 해주는 음식은 무조건 맛있다’라는 말이 있다. 대접을 해줘서 고맙기도 하지만 상대방이 수고로움을 참고 만들어 준 음식의 소중함을 알기 때문이다. 예전에도 지금도 먹는 일은 여럿이 참여를 하지만 주로 담당했던 엄마의 수고로움이 가장 컸다. 그리고 한국에서 빠질 수 없는 김치는 확고하게 엄마로 연결이 된다. 식탁에 빠지면 서운한 김치. 겨울이 오기 전 한 해 먹을 준비를 하는 김장철이 되면 엄마들의 수고로움이 여기저기 목격된다. 밭에서 몇 달 키운 배추와 고추, 무, 당근 등 재료들을 준비하고 판을 펼치고 완성은 수육과 함께 축하하면서 알음알음 자식들에게 보내진다. 허리가 아무리 아파도 자기 김치만 먹는 아들과 손주 때문에 김장을 포기하지 못한다는 어르신들이 계시니 입맛은 핏줄처럼 끈질기다.

김장김치

결혼 14년 차, 아직도 김장은 얻어먹고 있다. 12년은 시댁에서 2년은 친정에서 얻고 있는데 이웃들이 나눠주는 김장도 빠지지 않고 있다. 한두 포기, 양은 적어도 꼭 맛을 보여주는 이웃들의 김장은 한 해 어떻게 살았나 서로를 돌아 봐주는 마음, 앞으로도 건강하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어서일까 매번 맛있다.

그들의 수고로움으로 나를 채우고 다른 이를 돌볼 힘을 낸다.

다가오는 한 해도 김장만 있으면 먹고사는 기본이 되고, 버틸 수 있는 기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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