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보 여행자의 시선_걸으며 생각하며 Ep.1]
사천강, 바다가 되다
이순신바닷길 1코스, 대곡숲~선진리성
글・사진 조영아
걸으며 생각하는 걸 좋아해서
걷는 걸 좋아해요,라는 말을 종종 한다. 하지만 더 정확히는 걸으며 생각하는 걸 좋아한다. 몇 년 전부터 하동 섬진강 100리길을 문턱이 닿도록 다녔다. 팬데믹pandemic으로 몸살을 앓던 재작년 가을부터는 지리산 둘레길에 흠뻑 빠져서 종주 시작 8개월 만에 21구간을 완주했다. 그것도 혼자서.(나의 금쪽같은 휴일 23개를 소진했다!) 지리산 둘레길 완주로 용기를 얻어 작년 여름부터는 제주올레 종주를 시작했다. 그뿐인가. 제주에 갈 수 없는 막간을 이용해 남해 바래길도 틈틈이 걷고 있다. 그 길이 끝나면 또 다른 길 위에 서 있겠지. 길은 계속되니까.
사천에는 왜 그런 길이 없냐고?
남해 바래길 걷고 온 이야기를 듣던 직장 동료가 말한다. 얼마 전 TV에서 남해 바래길 소개하는 걸 보았는데 너무 아름다웠다고 그리고 부러웠다고. 그러면서 내게 묻는다.(왜 내게 묻지?) 사천에는 왜 그런 길이 없냐고. 사천에도 있기는 하던데… 서포 어디에도 있고, 정동 어디에도 있고… 나의 대답이 궁색하다. 남의 동네 좋다고 하는 길은 다 걸으러 다니면서 정작 우리 동네 도보 여행길은 알지도, 걸어본 적도 없다니! 괜시리 부끄럽고 미안해졌다. 나름 사천 부심負心이 있다고 자부했는데. 이제라도 사천을 한번 걸어 볼까, 그런 마음이 들었다. ‘걸어서 다녀보지 않고서는 그곳을 안다고 결코 말할 수 없음을. 두 발로 발도장을 찍은 곳만이 온전한 내 것이 된다는 것을.’ 제주올레를 만든 서명숙 씨의 말이다. 이참에 사천 구석구석에 내 발도장을 한번 제대로 찍어보자.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
시작점인 대곡숲의 정확한 주소를 찾지 못해 인근을 배회하다 어찌어찌하여 찾아간 정동면 대곡마을 숲. 아직 철이 아닌지라 휑하니 찬기운이 감돌았다. 그럼에도 수백년된 소나무의 품격은 낯선 여행자를 족히 품는 여유 그 자체였다. 바람이 살짝 부니, 인근 감나무밭에 갓 뿌린 신선한 거름 냄새가 났다. 농사꾼의 딸로 자란 덕에 향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거름 냄새가 그닥 거슬리지는 않았다. 대곡숲을 지나 수청산책로를 찾아가는 길, 이정표가 없다. 도보 여행자들이 걸어둔 그 흔한 리본도 화살표도 없고 길은 여러 갈래다. 어디로 가야 하나? 그때 마침, 동네 아지메 두 분이 오신다. 찬스다. 아지메들은 내게 수청가는 길을 가르쳐주시고, 나는 아침부터 말썽이던 한 아지메의 휴대폰을 고쳐주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

엄마를 본 듯, 고향에 온 듯
아지메들의 조언을 따라 수청마을을 향해 씩씩하게 걸음을 내딛는다. 조금 가다가 겨울 시금치를 캐고 계시는 동네 어르신들 앞에서 본능적으로 걸음을 멈춘다. 누군가 ‘고향 하늘과 바다와 바람이 나의 핏줄과 세포 깊숙이 저장되어 있다.’고 했던가. 나도 그렇다. 농사일에 무심하셨던 아버지를 대신하여 사시사철 논밭에서 사셨던 엄마. 언니 오빠가 객지로 나간 후 집에 혼자 남은 어린 막내는 학교를 가지 않는 날이면 언제나 엄마가 일하시는 논밭에 가서 놀았다. 선선한 나무 그늘 아래 누워 시시각각 변하는 구름 따라 상상의 나래를 폈다 접었다 하다가 입이 심심하면 삐기(삘기)도 뽑아 먹고 산딸기도 따먹으면서. 그런 유년 시절의 추억 때문일까. 도보 여행길에서 농사일하시는 분을 보면 자석에 끌리듯 다가가게 된다. 엄마를 본 듯, 고향에 온 듯, 그런 그리움이 가슴에 스민다.




텃새와 철새, 사이좋은 이웃이 되어
사천강을 따라 수청산책로를 걷는다. 여름 휴가철용 평상들이 벚꽃나무 옆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곧 꽃도 피고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시끌벅적하겠지. 사천강의 잔잔한 물결과 갈대 풍경에 취해 걷다 보니 이내 죽담마을이다. 마을 벽에 훼손하면 안되요!,라고 적힌 대통령 선거 벽보가 눈에 띈다. 아, 오늘은 대통령 선거일. 오늘 밤, 역사의 주인공은 누가 될런지. 죽담마을에서 예수마을까지는 하천공사가 한창이었다. 혹, 올봄에 이 길을 걸으실 분은 죽담교를 꼭 건너 걸으시길 추천한다. 예수마을을 거의 벗어날 때쯤(반대 방향에서 오면 예수마을 초입) 오인五印숲이 보인다. 숲이 그리 크지는 않지만 꽤 옹골차다. 오인숲 평상에서 아침에 내린 커피 한잔 마시며 쉼표 하나 찍는다. 길은 사천교(사천읍)를 지나 한참을 더 사천강을 따라 이어진다. 별다른 이정표는 없어도 강줄기가 확실한 안내자가 되어 준다. 아아… 여기서 내 마음을 훔친 사랑스런 녀석들, 바로 사천강의 텃새와 철새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고향도 생김새도 다른 녀석들이 한 동네에서 사이좋은 이웃이 되어 살고 있다. 저들의 평화를 방해하고 싶지 않은 마음 반, 저들의 평화에 내 마음 한 켠 얹고 싶은 마음 반으로 넋 놓고 바라보았다. 부럽다.



사천강, 바다가 되다
어느덧 걸음은 해안산업로에 다다랐다. 공군부대 펜스가 끝나는 지점에서 강은 바다가 된다. 눈앞 장면은 두 번째 신scene, 즉 강에서 바다로 바뀐다. 강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서 다시 한번 철새들의 향연과 조우하게 된다. 아, 필설筆舌로 어찌 형용하랴! 사천만을 따라 조금 더 걸으니 사천대교가 보인다. 언젠가 막내딸이 친구 이름이라며 가르쳐 주었던 윤슬, 그 윤슬이 대교 아래 빛나고 있다. 철새에 빼앗겼던 마음이 어느새 윤슬에게로 옮겨간다. 사람의 마음이 이토록 간사한 것을. 종점인 선진리성을 향해 가는 내내 사천만의 광활함과 웅장함에 압도되었다. 사천해전에서 거북선을 최초로 실전에 투입한 이유가 이 때문인가. 400년이 지난 사천해전의 위엄이 여전히 건재하다.
추신追伸.
첫째, 길을 걸으면서 가장 아쉬웠던 것은 이정표다. 시점과 종점에 대한 표식은 말할 것도 없고 걸음걸음마다 방향을 알려주는 뭔가가 있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흔한 화살표나 리본 같은 것도 괜찮고 이순신바닷길이라 했으니 화살 모양이나 깃발 모양도 괜찮다. 암튼 도보 여행자가 길을 잃지 않을 뭔가가 꼭 있어야겠다. 두 번째는 여기저기 공사 중인 현장에 대한 개인적인 소회다. 필요 불가결한 일이라 하겠지만 이곳, 사천 사람들의 오랜 추억들은 제발 남겨주었으면 하는 간절함이 있다. 마지막으로, 길 이름이다. 이순신바닷길, 사천희망길도 나름 의미는 있다. 하지만 더 사천스럽고 동시에 따뜻함이 배인 그런 이름이 없을까. 사천 출신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고 위로를 받고 여러 길 이름을 아우를 수 있는 그런 이름. 스스로 던진 질문에 답을 찾으며 걸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아니, 꽤 괜찮은 길동무가 될지도.
※ 개인적인 지식과 생각에 의존하여 작성된 글이라 일부 내용이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여행일 2022-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