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동 수남길 따라
기억의 퍼즐을 찾아 동네 한 바퀴
글· 사진 김도숙
오래된 골목은 정겹다. 낯익은 이웃들의 삶의 터전이며, 어린 시절의 추억과 향수가 고스란히 배어 있기 때문이다. 고향을 떠나 있다가 다시 찾을 때면 한길보다 골목길을 따라 걸어보곤 했다. 그 속에서 유년 시절부터 학창 시절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을 지도 모른다는 까닭에서였다.
볕 좋은 가을 어느 날, 나는 다시 골목길을 찾았다. 내 유년의 기억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는 우리 동네의 모습을 그려보고 싶어서였다.
우리 동네는 지금의 삼천포용궁수산시장과 접해 있는 곳이라 늘 사람들로 흥성거렸다. 예전에는 삼천포 앞바다에서 잡히는 어획량이 많을 때라 아침 시장에는 팔딱거리는 생선들과 싱싱한 푸성귀들이 아주머니들의 장바구니에 가득 담길 수 있었다.
승용차가 많지 않던 시절, 집 앞 동네는 고만고만한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동네 아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삼삼오오 밖으로 나와 어둑해 질 때까지 구슬치기, 뜀뛰기, 줄넘기, 단방구(다방구의 사투리), 술래잡기 같은 전래 놀이를 번갈아하며 놀았다. 베이비붐 시대라 집집마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 시절엔 부모보다 언니, 오빠들에게서 삶의 많은 것들을 보고 배웠다. 그때 본 동네 거리는 하늘만큼이나 넓디넓어 온 동네 아이들을 다 품어 주고도 남았다.

그러나 지금은 길가 양쪽에 주차해 놀은 차량들로 동네거리는 비좁기까지 하였다. 아이들은 찾아보기 힘들고, 수산시장이나 전통시장에 물건을 사러오는 사람들만 간혹 오갈 뿐이다. 우리 동네 사거리에 서서 동서남북을 보면 동쪽으로는 서부시장 쪽에서는 꽤 유명했던 중앙약국이 있던 자리다. 지금은 낡은 간판만 남은 빈 가게가 되어 있다. 그 옆으로는 주로 음식점과 식육점, 야채 도매상들이 늘어 서 있다.
예전에 중앙약국 옆에는 ‘영화루’라는 중국집이 있었다. 짜장면은 졸업식과 같은 뜻 깊은 행사 때나 맛볼 수 있는 별미였다. 그 옆에는 떡집이 있었다. 여름에는 아이스 케키를 팔고, 그 밖의 계절에는 떡을 주문 받아 팔았다. 무더운 여름날이면 소년들은 아이스 케기를 담은 나무통을 하나씩 어깨에 메고 “아이스 케키 사려~”목청껏 소리 지르며, 거리를 다녔다. 명절이 다가오면 떡 주문을 하는 사람들은 줄을 서서 차례로 자기네 떡 담을 통을 놓아두었다. 떡집을 떠올리면 갓 한 떡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하얀 김과 고소한 떡 냄새가 지금도 내 눈과 코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리고 떡집 옆 작은 골목을 지나 손수 제작하여 만드는 구둣방이 있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기성화가 없어 큰 맘 먹고 어른들은 구두를 맞추곤 하였다. 그 옆에는 가구점이 있었고, 한 블록이 끝나는 지점에 하얀 타일 벽으로 된 2층 건물이 있었는데, 삼천포에서 유명한 과자점이었다. 상호가 있었는지는 기억이 없고, 과자집 주인인 혹부리 영감님의 별명을 따 ‘혹보 과자점’이라고 불렀다. 혹보 영감님의 얼굴에 달린 혹은 처음에는 작은 혹이었는데, 점점 커져 목까지 내려오는 긴 혹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 혹에 복이 들어 있어 장사가 잘 되어 부자가 되었다고 말하곤 하였다. 어머니 심부름으로 우리 할아버지 드릴 사탕을 사러 가면 알록달록한 사탕 말고도 시각과 미각을 자극하는 온갖 과자들이 어린 나를 유혹하곤 했다. ‘혹보 과자점’은 몇 번 점포가 바뀐 뒤에 지금은 해물탕집이 되어 있었다.

수남4길에서 서쪽으로 나가면 ‘중앙미용실’이 있던 곳은 귀금속 가게로 바뀌었고, 그 옆으로는 어선선박중개소나 페인트가게, 잡화도매상이 들어서 있다. 주로 배와 관련된 업종과 식자재들을 파는 가게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곳에서 모퉁이를 돌면 골목길에 우리 집 뒷마당과 붙어 있는 ‘삼천포극장’ 터가 나온다.
텔레비전이 보급되기 전에 극장은 사람들의 유일한 문화 공간이었다. 새로 상영되는 영화나 쇼를 번갈아가며 하여, 영화를 보거나 유명 가수의 쇼를 보기 위해 사람들로 늘 북적거렸다. 우리 집 뒤뜰에서 귀 기울여 들으면 영화 속 배우들의 대사나 가수들의 노랫소리가 들리기도 하였다. 돈이 없던 남자 학생들은 극장에 들어가기 위해 종종 우리 집 뒷담을 넘어 극장 개구멍으로 몰래 숨어 들어가다가 재수 없으면 표 받는 아저씨에게 들켜 얻어맞고 쫓겨나기도 하였다. 지금은 사설 주차장으로 바뀌어 있어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그 길에서 조금만 가면 언덕배기에 높이 솟아 있던 삼천포경찰서 터가 나온다. 일제강점기 시절 야트막한 산을 깎아 만든 경찰서에는 큰 나무와 작은 나무들이 잘 조경된 넓은 터가 있었다.
놀이터가 귀하던 시절이라 경찰서 언덕배기에 올라가 가끔씩 친구들과 놀곤 했는데, 지하에는 감옥이 있어 죄수들을 수감해 두거나 죽어나간 사람들도 있다하여 전설 따라 삼천리 마냥 무서운 곳이기도 하였다. 해 질 무렵, 한길 가에서 바라보면 주홍빛 벌건 해가 경찰서 나무 위에 걸릴 때 나무는 검은 실루엣을 만드는 광경을 연출했다. 또 하루해가 넘어가는 그 모습은 왠지 모르게 애수를 자아냈다.
그러나 지금 경찰서 언덕은 평평해지고 도시재생사업으로 현대식 에코주차장이 들어 서 있다. 에코 주차장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더 가면 시내버스 종점인 서부 주차장이 나온다. 예전에 그 맞은편에 전형적인 일본식 건물이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삼천포의 멋진 호텔이 있던 곳이다. 넓은 로비와 다다미로 된 방이 있었다고 하는데, 잘 보존되지 못해 무척 아쉽기도 하다.

골목길은 아직 남아 있지만, 예전의 길은 아니었다. 도시개발로 거리는 넓혀지고 사통팔달로 이어졌지만, 골목과 골목으로 이어져 큰길과 만나 마을을 이루던 아기자기하고 정겨운 길을 잃어버린 것 같아 왠지 마음이 허전하다.
길을 넓히느라 오래된 나무들이 베어져 없어지고, 가로수가 사라진 길가는 삭막하기 그지없다. 예전의 것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지금, 오래 된 골목 풍경은 과거의 기억 속에서 그리움만으로 남아 있다.
내 안에 쌓여 있는 기억의 퍼즐을 맞추듯 내가 살던 동네를 따라 걸어 보았다. 더 이상 맞출 수 없는 조각들이 많아질 때마다 나를 이루고 있던 과거도 사라져 버린 듯 가슴속 한 켠이 허전해졌다.
점점 변해만 가는 동네가 낯설어지는 까닭은 도시 행정을 맡고 있는 이들이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나무 한 그루, 집 한 채도 마땅히 보전해야 할 소중한 가치가 있는 유산이라는 생각의 부재 탓이리라.
오래 전, 벨기에 브뤼셀을 대표하는 상징물을 보았던 기억이 난다. 오래 된 골목길 모퉁이에 서 있는 아주 작은 ‘오줌싸개 소년’의 청동상이었다. 그것은 1619년에 어느 조각가에 의해 만들어진 오래 된 동상이다. 사실 평범하고 허름한 동상에 실망하였지만, 그 나라 국민들에게는 매우 자랑스럽고 소중한 문화유산이었기에 옮기지 않고, 그 자리에 보존하여 관광 상품으로 만들어 보여 주었다. 유럽인들의 전통문화에 대한 이런 인식을 우리도 본받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50년, 아니 100년이 흘러도 우리 지역만의 개성 있는 풍경을 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우리 고장을 사랑하는 마음만큼이나…….
